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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May 09. 2023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는 없어

음악치료사의 시선

“교수님은 왜 철학을 하셨어요?”


  종강을 기념한 식사자리에 합동 수업을 하신 철학과 교수님이 함께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한 학생이 물었다.

 

  “학부 때 천문학 전공이셨잖아요? 어떻게 진로를 바꾸신거에요?”

  “사건이 있었지.”


 교수님은 우주 저 안쪽의 시간을 끄집어 내려는 듯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도 공부 좀 한다하고 대학에 갔거든. 별을 보는 과인 줄 알고 천문학에 지원한 거야. 순수학문을 하고 싶었지. 근데 맨 수학, 물리 문제만 풀고. 아~ 참.”

  

  교수님은 소맥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한번은 물리학 시험을 봤는데 물리학과 친구가 시험을 너무 못 봤다는거야. 몇 점인지 물으니 86점이래. 야, 그 정도면 잘 본 거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 과에서 100점만 네 명이라는 거야. 아이고. 난 37점 맞았는데.”

  “아, 정말요?”


  너무 웃긴데 교수님의 진지한 표정에 웃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나와도 이런 고민이 있구나. 누구나 나름의 물웅덩이는 있는 법.


  “그래서 난 생각했지. 야, 이건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한 소년이 생각났다. 영재학교에 출강을 할 때였다. 한 아이가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음악실 밖을 나가지 못하더니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덩치도 큰 열일곱살짜리 소년이 울자 나는 당황했다. 아이는 음악마저도 잘하는 친구들에 비해 자신이 못 해내는게 너무 분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재학교 아이들은 대체로 인지능력이 좋아 간단한 음악은 단번에 외워버리고, 악기 연주도 한 번에 쳐버렸다. 물론 음악적 테크닉이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학교에 비해 수행도의 클래스가 남달랐다.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잖아?”


  소년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 나는 슬쩍 미소가 났다. 녀석은 머리로는 알겠는데, 손으로 연주하려면 그게 잘 나오지 않고, 그러다보니 자꾸 늦어지거나 틀린다는 것이다. 뇌와 손의 협응에 자꾸 렉이 걸린다. 음악은 타이밍을 놓치면 어긋나니까.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지났다. 아하, 오늘 점심 타이밍도 놓친 것 같군.


  “너도 니가 잘 하는 분야가 있잖아. 너가 음악마저 잘해버리면 선생님은 뭐 먹고 사니?”


  나의 자학 개그가 먹혔을까, 녀석은 울다가 웃는지 웃다가 우는지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다.


  “고맙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줘서.”


  어느새 녀석은 눈물을 거두고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그 소년에게서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연습실에서 질질 짜고 있던 나의 찌질한 고등학교 시절을 말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나는 선생님과 같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그 막막함에 짜증이 났다. 좁은 연습실에서 쭈구려 앉아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큰일이 난 줄 알고 헐레벌떡 담당 선생님이 들어 오셨다.   


 “너 왜 울고 있니?”

 “제가 너무 못해서요. 제 소리가 듣기 싫어요. 선생님들처럼 잘 하고 싶은데.”


  선생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언젠가는 그 소리를 닮을 수 있다는 거야. 지금 당장은 되지 않더라도. 네가 그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니까.”


  정말로 시간은 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때가 있었다. 음악을 머리로는 이해했더라도 소리로 구현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어떤 특별한 부분의 신체 근육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연습으로 그 근육을 단련시킨다. 물론 신체적으로 뛰어난 음악가들은 한번에 구현해 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기 위한 호흡의 연습량은 누구나 필요하다. 그것이 길든 짧든.  


  어쨌든 학창시절의 나는 당장 그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에 속상했고, 그걸 연습 시간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내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 파악해야 했다. 자꾸 틀리는 부분, 놓치는 부분을 연습하고 모니터링하기를 수십번 하며 바로잡는다. 마치 정교한 도자기를 빚듯 그렇게 음악을 유려하게 다듬어간다. 우리의 연습은 재미있게도 서서히 나아진다기보다 그 시간들이 모여 준비가 되면 훌쩍 허들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맛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공력이다.      




  교수님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난 뒤늦게 잘 된 거지.”

  “맞아요. 적성에 맞는 학문이 내 전공이자 밥벌이면 진짜 성공하신거네요.”

  “그래 그때 그 친구랑 그런 대화를 안 했다면 몰랐겠지. 다행히 빨리 다른 길을 찾았고, 내가 잘 하는 것, 못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해. 세상은 슬프게도 결과만 보여지더라.”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그걸 메타인지라고 한다. 결과는 과정의 단면일 뿐이지만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실패의 과정에서 빨리 나를 파악하는 거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점은 조금 나아졌는지, 내 마음은 어땠는지, 그러면 다음의 과정에서는 조금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또 다음의 과정에서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살면서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정확히 나를 파악하지 못하면 좋은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삶에 있어서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내가 준비된 상태, 즉 나를 잘 아는 상태에서의 선택과 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선택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선택은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 기준이 모든 것이 될 필요는 없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은 자주 메타인지를 돌려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 마음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 컨디션은 어떤지,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나는 얼만큼 할 수 있는지. 현재 나의 상황에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그렇게 나에 대한 파악이 되어 있다면 어느새 거절할 때 적당히 거절하고, 할 때 확실히 해내는 튼튼한 어른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에세이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 의 연장선에서 음악치료사의 일상과 직업적 생각을 담고 연재합니다. 책이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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