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열심히 스케치 했는데 색을 칠하면 망할까봐 미완성으로 두는 그림들이 있다. 색을 입히는 일은 구도를 잡는 일과는 또 다른 능력을 요한다. 색을 잘 알아야 하고 색을 칠하는 붓을 잘 알아야 하고, 내 손이 색과 붓과 물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하며 단련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판단이 중요한데, 색의 조합,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형태의 입체감, 스케치 과정에서 세운 작품의 주제를 완성도 있게 끌고 가는 지구력 등이 순간 순간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혹시 틀렸다 하더라도 다시 수정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 있다.
주말이 되면 아이는 아예 자기 이젤을 끌고 와 세워두고, 내가 이젤로 사용하는 독서대를 식탁 위에 턱 올려 놓는다. 그림 그리기는 토요일 한 낮의 리추얼로 자리 잡았다.
물통에 물을 담아 수채화물감을 쓰는 그림은 크래파스나 싸인펜보다 훨씬 우연성을 가진다. 물을 탈 때마다 같은 색깔이라도 감이 달라진다. 붓에 물을 많이 머금으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번지고, 색이 섞이기도 한다. 으앙, 아이는 새로운 재료에 미처 적응하기 전에 드러누워 울었다.
손 쓸 틈도 없이 주르륵 흘러버린 핑크색은 4살 아이를 분노케 하기 충분했다. 으앙앙 나도 울고 싶다. 상큼한 초록을 원했던 나는 칠할 수록 망해가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수채화하기에 얇은 200그람의 종이는 물을 댈수록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색을 덧댈수록 탁하게 번져간다. 두꺼운 종이 사야겠다. 마스킹테이프 사야겠다. 초록색 물감 사야겠다…. 아…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었다.
한참을 바닥에 드러누워 앙앙 울던 아이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붓을 한참 씻는다. 이제 다른 색깔을 풀어내 덧칠해본다. 망한 그림을 수습해보는 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꽤 재미있다. 새로운 재료를 탐색하며 나도 헤매고 아이도 헤매며 망하는 법을 연습 중이다. 엄마는 무슨 색이 좋아? 나는 토끼를 그렸어. 토끼가 생일파티 중이야. 초록색을 칠하니 좀 나아진 것 같아.
종알종알 쉴새 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그림을 그려내는 아이를 본다. 외롭지 않다. 망설임 없이 붓을 그어 다작을 하는 아이를 보며 색칠할 용기를, 그리고 망할 용기를 얻는다. 망하면 또 스케치북을 넘겨 그리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