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 어렵다. 다만 학창 시절 그녀가 소심한 성격 탓에 왕따를 당했었고, 마치 돌림병처럼 번지는 왕따놀이에 휩쓸려 그녀가 힘들어했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다. 다른 아이들은 그럭저럭 잘 견뎠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남보다 마음의 두께가 카스텔라처럼 부드럽고 연약했다는 것. 결정적으로 기억력이 너무 좋았던 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걔집애의 경멸 어린 눈빛을 기억한다. 그 아이가 자신을 바닥에 내팽개쳐 발로 밟을 때 신은 신발, 그 여자애 명찰, 자신에게 보낸 카톡의 내용을 토시 하나까지 기억한다. 교실을 들어섰을 때 수군거리던 아이들의 대화도 모두 기억이 난다. 그 골목을 지날 때마다, 학교 안 화장실을 갈 때마다 기억은 소름 끼치게도 그녀를 뒤흔든다.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사 다니기를 여러 번, 그러자 그녀의 학창 시절이 끝나버렸다.
대학을 가서 그녀는 어찌어찌 연애를 시작했다. 술자리에서의 때 아닌 폭로로 시작된 어리숙한 연인 사이였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다. 감정표현이 서투른 그녀는 자꾸만 그에게 잘해주려는 만큼 실수를 했고, 남자는 다른 여자가 생겨 그녀를 떠났다. 헤어지자 남자가 생각나 미칠것 같았다. 남자와 했던 첫 키스의 감촉, 잡은 손의 보드라운 느낌, 늘 가던 카페 안 창가 자리,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본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나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배신감에 꺼억꺼억 숨이 넘어갈 듯 울어도 잊히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그 기억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녔다. 남들은 쉽게도 잊어버리던데...... 그녀는 그와 있었던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 되어버렸고, 자신을 놓아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는 기억 속의 아픔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컴퓨터 속 폴더 비우기처럼 그녀는 자기를 따돌렸던 못된 걔집애들을 기억 속에서 지웠고, 그녀를 떠난 남자친구를 지웠고, 술자리에서 그녀의 다리를 더듬었던 선배의 이름을 지웠고,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나쁜 소문을 낸 동아리 후배를 지웠다. 공개석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망신 준 담당 교수의 이름을 지웠다. 승차 거부하는 택시를 기억 속에서 지웠고, 편의점 알바 중에 자신에게 욕을 한 손님도 지웠다. 한번 지우기 시작하니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든 미용사를 지워버렸고, 지하철에서 발을 밟고 간 중년의 남자도 지워버렸다. 그녀는 세상에게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렸고, 그러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만약 그녀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분명 그녀에게 아픔을 준 사람일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면, 헤어진 이후의 아픔이 싫어 연애시절을 통째로 지워 버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아픔이 싫어 엄마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 자신보다 잘나서 항상 질투가 났던 그녀의 친구도 잊어버렸다. 기억을 지우는 버릇이 이제는 병처럼 앓게 되었다. 전혀 아프지 않은 머릿속 병. 좋은 기억마저 지워져 버렸다. 이내 사람들은 그녀를 떠났고 그녀 역시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새로 얻은 직장에 가는 길을 잊어버렸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슈퍼에 가는 길도 잊어버렸다. 마음을 안 다치고자 했던 버릇이 이제 머릿속을 손상시키고야 말았다. 그녀는 이제 집에 가는 길도 잊어버렸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그녀를 잃어버렸다. 2013 by.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