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ha, CZECH
오랜 여행의 후유증은 타인의 부재에 의해 갑자기 몰려왔다. 우리가 이 여행에서 대외적으로 마주쳐야 할 일정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며칠간,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아주 즉흥적으로 정해버렸다. 프라하, 프라하로 가자. 그리고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을 가로질러 달리고 달려 체코 프라하로 향했다. 꽤 멀었다. 유럽은 가까운 듯해도 이동 시간으로 치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멀었다. 그래도 우리는 정해진 일정이 아닌 우리가 머물고 싶은 도시를 향해 달렸기에 기꺼이 그 수고를 감내했다.
휴게소에서 1유로도 안 되는 싸구려 빵과 뉴텔라로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쉬면서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 찾기 놀이를 했다.
"너 찾으면 내가 아이스크림 쏜다!!"
"진짜지? ㅎ_ㅎ!!"
결국 이 깜찍한 녀석은 네 잎 클로버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래 프라하 가면 쏠게!!
뭔가 축 처져있던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 잠시 희망도 생겨났다. 뭔가 즐거운 일이 생겨날 것만 같은 기대 말이다.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넷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솔직히 말해 지쳐있었다. 몸도, 마음도, 이렇게 넷이 같이 다니는 것도. 어떤 이는 감기몸살에.. 싸우는 것도 지쳤다. 실은 우리 넷은 갈등이 있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세 달째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참 긴 시간 함께 했다. 여행이었지만 공연을 동반한 여행이었기에 대사관, 한인회, 그밖에 우리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을 웃으며 대해야 했었고, 우리를 보내준 주최 측과도 잘 조율해야 했다. 그 덕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그때 풀었으면 좋았을 사소한 일들이 상처가 되고 덧나 고름이 맺혔다. 우린 너무 어렸고, 배려에 미숙했다. 화해하는 법을 잘 몰랐다.
유스호스텔로 숙소를 잡고 다시 이 네 명은 모여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너무나 지쳐있었고, 늘 문제 되는 것이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지금껏 끌어온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한 친구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고 우리의 생활(여행)과 대외적인 활동이 연결되지 못한 가식적인 어떤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우리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을 이제야 터트린 게 아닐까 싶다. 프라하, 여기서 우리는 우리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네덜란드 공연을 취소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잡힌 공연을 책임감 없이 이렇게 취소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이대로 공연을 강행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옳은 판단이었는지,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린 장소와 시간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하고 찢어져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프라하에서의 자유시간.
이렇게 씁쓸한 이야기를 하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의 무능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답답해진 폐를 안고, 나와 네 잎 클로버 동생은 다시 올드타운 스퀘어(구시가지)로 발길을 돌렸다. 노보텔에서 대충 그려진 프라하 지도를 하나 얻어 골목골목 찾아 들어간 순간!
사진으로만 보던 천문시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더구나 정각에 쇼를 한다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55분!! 정말 운이 좋았다. 천문시계 앞에서는 모든 관광객들이 목을 빼고 정각을 기다렸다가 시계탑이 쇼를 하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톱니바퀴 같은 것이 움직이며 인형이 들락날락하는 시계탑은 유럽 여행 중에 봐온 다른 시계탑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섬세하고도 아름답다. 나도 함께 입을 쩍 벌리고 시계탑 쇼를 바라보다 박수를 열심히 쳤다. 쇼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렸다. 광장이 텅 비어버렸다. 잠시 허망함에 서 있다가 우리는 구시가지 광장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매장을 발견하고 보고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녹차 맛이 있을까?"
"글쎄, 근데 있다 해도 너무 비쌀 것 같아. 괜찮아 다음에 사줘."
여행자에게 돈이 없다는 건 참 서러운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 하고 싶은 것 하나도 못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니. 그래도 구경이나 하자 싶어 기웃기웃 거리다 우리가 무슨 거지 같은 기분이 들어 그만 나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유럽에는 녹차 아이스크림이 없단다. 그나마 샘통이다.
한국에서 마침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을 한 상태라 프라하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물론 나는 보지 못했지만. 이 녀석은 열혈 팬이었는지 프라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 분수는 주인공들이 첫 키스 하는 장면, 시계탑 앞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 기다리던 곳, 등등. 덕분에 아주 편하게 잘 다녔다. 한국 여행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처에 까를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까를교로 향했다.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역시 프라하는 관광도시였다.
까를교, 그곳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랐다. 뭔가 달달하다고나 할까? 까를교 밑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고 저 건너 프라하 성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깜깜한 밤, 까를교 노란 가로등불 아래... 연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으으..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아무 말 없이 바로 후회했다. 동성과 같이 온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곳은 연인과 와야 하는데...으헝헝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음엔 남자친구와 올 테다!!!"
우린 두 주먹 불끈 쥐며 다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보석처럼 빛나는 프라하 성과 낭만이 가득한 까를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분 붙잡고 뽀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누군가 내 옆에 있다면, 이 아름다운 순간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소냐.
이제 갈까 싶어 돌아서는데 순간!!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저 멀리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꺄아."
펑펑 예측할 수 없는 모양으로 터지는 마력의 형체.
그냥.. 눈물이 났다.
사르륵, 사르륵 녹아내렸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나의 어깨를 누르던 자책과 괴로움이 사르륵..
"이게.. 우리한테 주는 네 잎 클로버 행운인가 봐."
"그래도.... 다음엔 남자 친구와 올 테다!!"
"그래!!!!!!!"
@2006 Praha, CZECH
조금 오래된 여행은 사진이 없거나 협소한데, 이렇게 일기라도 남아있으니 참 좋습니다.
그래서 여행일기를 쓰나 봐요. 사진보다 더 추억하기 좋군요. 기억의 미화도 좀 덧붙여.
+마지막 사진 빼고는 gogle에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문제가 될 경우 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