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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의 다락방

Paris, FRANCE

by 구수정

난 어쩐지 '파리'라는 차가운 발음보다 '빠-(ㅎ)리'가 좋다. 입술이 부딪치다 바람이 힘없이 후 빠져버리는 발음. 빠-ㅎ리.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한글이지만 이 정도로밖에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쉽다. 그저 글자는 2차원적이어서 입체감은 빠져 버린 무채색 드로잉처럼. 그리고 부를 줄 모르는 오선지의 음표처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아쉽다.

빠-리에 대한 환상은 아주 어마어마했다. 비행기에서 바로 내린 빠리는 그 환상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은 지친 가운데 내비게이션 없는 렌터카를 몰고 빠리시내를 한 두 시간쯤 뱅뱅 돌고 나면 환상이란 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다. 여행자에겐 무심한 순환도로, 복잡한 시내. 여하튼 주소 하나 들고 2 zone에 있는 집을 찾아 파김치가 된 채 도착했다.

그곳은 앞서 스트라스부르크 여행에서 만난 어떤 이들의 집이었다. 꽤 커다란 집이다. 우리가 잘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사실 빠리의 공식일정은 없었기에) 흔쾌히 꼭대기 다락방을 내어주셨다. 뜻밖에 운이 좋았다. 누군가 세 들어 살다 지금은 책상 하나, 침대 하나 덩그러니 있는 다락방. 오랫동안 사람이 쓰지 않아 포근한 감은 덜 했지만 천장의 나무 냄새가 났다. 숨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읽기에 딱 좋았다. 100일쯤은 쌓인 먼지를 가볍게 떨어내고 환기를 위해 낮은 천장 지붕에 달린 창문을 열었다. 꽤 가깝게 에펠 타워가 보이는 전망 좋은 다락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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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내 방을 지독히도 갖고 싶었다. 아주 어릴 때는 네 가족이 한방에서 생활을 했고 초등학교를 들어갈 즈음에 방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 마저도 개구쟁이 동생이 나의 고요를 다 망쳐버렸다. 그러나 우리 외갓집에는 여기 빠-리의 다락방처럼 경사가 급한 계단을 오르면 꼭대기에 다락방이 있었다. 동생은 아직 어려서 올라오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장소. 마루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콤콤한 옛날 냄새가 났다. 천장이 낮아 머리를 쿵쿵 부딪치는, 그래서 자연스레 겸손한 자세가 나오는 그곳에는 이모들이 어릴 때 안고 자던 곰인형들과 누군가와 주고받던 편지들, 삼촌의 스케치북, 조그만 크기의 세계 문학 전집 쓰리즈가 촤라락 꽂혀 있었다. 나는 어른들이 졸음이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에 몰래 올라가 보물을 찾듯 책을 뒤적이다 잠이 들곤 했다. 이제는 다 커버린 이모들의 어린 시절 흔적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시간을 거슬러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어느 시절의 이모들. 참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어느 시간이 되면 깜깜한 창문 밖으로 에펠 타워가 번쩍거리는 빛을 쏜다. 내가 빠-리에 있다는 것을 매일 밤 에펠은 증명하듯, 그 빛은 작은 창문을 통해 우리 다락방을 훑고 지나간다. 그러면 얼른 창문을 열어 아름다운 자태로 반짝거리는 에펠타워를 보기 위해 얼굴을 내민다. 차가운 밤공기가 코 끝을 스친다. 지친 마음이 입속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흐물거린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다. 세상이, 빠-리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가슴이 쿵쿵 설레기 시작한다. 유난히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한밤의 에펠 타워 쇼. 에펠의 불빛은 유난히도 탐스럽다. 갖고 싶을 만큼. 도대체 얼마나 큰 전구를 붙여 놓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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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상을 해본다. 저 보석과도 같은 에펠 타워를 보기 위해, 외갓집 다락방의 한 소녀는 시간을 건너 빠-리의 어느 다락방으로 순간 이동했다고.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은 채 늘 꿈꾸게 되는 곳.
아, 아름다운 빠-리의 밤이다.


@2006 Paris, FRANCE






*앞 표지 사진은 gogle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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