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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지갑사건

Mt. Fuji, JAPAN

by 구수정

두 번째 일본, 도쿄 여행
처음 일본을 갔었던 아키타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도쿄 여행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정신없이, 도피하듯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했다.

여행 당일 동행자, 나의 친구가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채 공항에 나타났다.

"친구야... 너 괜찮니??!!"
"괜찮아. 우리 빨리 비행기 타자."

여행을 위해 친구의 무리한 대체근무,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못 간다고 할 줄 알았던 친구는 얼른 서울을 뜨잔다. 나 역시 돌아오면 닥칠 어마어마한 일거리들을 두고 지금 당장이 아니면 떠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20대 중반 이 여자 둘은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뜨고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서울을 떠나는구나.."

여행을 간다는 것보다 서울을 떠난다는 게 더 중요했던 순간이었다. 급하게 비행기 안 셀카를 후다닥 찍고는 채 두 시간이 안 되는 비행시간 동안 우리는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나리타 공항에 내려졌다.

후덥지근한 공기.
빼곡한 일본어.
쉬고 싶었다.

우리는 예약한 왕자 호텔(호텔 이름이 프린스)이 있는 신쥬꾸로 버스를 탔다.

도쿄는 정말 서울의 확대판이었다. 정신없는 신주쿠는 명동 한복판 같았고, 하라주쿠는 이대 앞, 우에노 공원 건물은 대학로 서울대병원, 신궁 근처 빌딩 숲은 여의도. 그 와중에 욘사마는 얼마나 광고를 많이 찍어댔는지.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여행이 지루해졌다.
복잡하기는 서울의 10배였다. 실망이었다.

우리는 후지산에 가기로 했다. 꽤 즉흥적으로. 당장에 후지산 근처에 일본식 다다미방을 예약하고 짐을 꾸려 왕자 호텔에 맡기고는 1박 2일 후지산행을 감행했다. 편의점에서 당시 한국에 없었던 카레라면 한 사발 흡입하고는 후지산 행 버스에 올랐다. 무언가.... 후지산에 가면 진짜 일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행 속 여행을 하게 된 우리는 비행기를 탈 때보다 더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내릴 곳을 놓치지 않으려고 잠도 못 자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버스 시설이 잘 되어있는 덕분에 놓치지 않고 잘 내려 우리가 잘 숙소까지 잘 왔는데 말이다.



글쎄, 지갑이 사라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다시 시작한 우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지갑을 잃어버리다니......



우리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계산해 보았다. 나머지 여비는 도쿄에 묵은 호텔에 맡긴 짐에 있었다. 이곳 숙소는 미리 계산했으니, 돌아갈 돈만 있으면 되었다. 얼추 차비가 나왔다.


그래.. 도쿄만 가면 될 거야.


일단은 후지산 밑까지 왔으니 내일은 후지산에 올라가자.


그리고 도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자.


왠지 잘 될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 쾌쾌한 다다미방의 냄새를 맡으며 오래된 일본을 느껴보자. 하. 하. 하 그래 이게 일본이지!! 우린 무슨 배짱인지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후지산 5 고메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 그곳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후지산은 꽤 높았다. 해발 3천700여 미터나 되니 우리나라 한라산이나 백두산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높이다. 게다가 비행기 타고 나리타로 올 때 구름 사이로 보이는 게 바로 후지산 아니던가.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 닥닥 긁어서 노래도 부르며 산을 올랐다. 어느새 우리는 구름층을 뚫으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안개보다는 조금 진한, 촉촉한 느낌이 땀을 식히며 목도 축여 주었다. 구름이 둘러싸인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던 손오공과 배추도사 무도사 기분도 이럴까 싶었다. 과연 오길 잘했다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등산화 앞코가 터지며 발가락이 탈출하려는 상황까지 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뭐.. 버리고 가면 되지.. 짐이 더 줄겠구나.




산을 내려와 우리는 도쿄, 우리 왕자 호텔이 있는 신주쿠행 버스를 찾았다.


그런데...


계산을 잘못 한 것이다.


숙소에서 후지산 5 고메까지 올라오는 버스비 계산을 빼먹었다.


이런..


점점 막차시간을 다가왔다. 도쿄에 있는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단 매표소 앞에서 우리를 도와줄만한 젊은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자니까, 그리고 대학생이라면 영어 정도는 할 줄 알겠지! 라며. 꽤 말끔하게 생긴 한 남자를 찍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can you speak english?"


남자는 순간 얼어버렸다..... 바로 이 표정으로 @_@


"help me... I've lost my wallet..ㅜㅅㅜ"


"ammm..... ammmm"('_' ;;;;;)


"어떡하지? 영어 못하나?"


"한국말로 해봐..."


"저기요.....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요..."


"........"


"지갑요... 머니!!! 머니!!! 돈!! 엔화....!! 아 어떡하지...? 우리 도쿄 고고.. 벋 머니 없어 ㅠㅠ"


"@#$%^&**%(*&^%$#"


그 일본 남자는 갑자기 뇌손상이 온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고 갑자기 늙어가고 있었다. 영어는커녕 바디랭귀지도 못 알아듣는 듯했다. 하긴 조그만 여자애 둘이서 계속 자길 붙잡고 늘어지고 있으니.. 어떡하지.... 어떡하지...... 너무너무 미안한데 정말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매표소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왔다.


아저씨 역시 단 한 단어도 못 알아 들었다.


우리는 오버액션 바디랭귀지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 버스... 어제... 예스터데이 나이트... 로스트 지갑... 우리 도쿄 가고 싶어.. 고고씽..."


지갑을 잃어버린 당사자인 나는 날이 어둑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면서 흥분한 나는 급기야 매표소 앞 지갑 잃어버린 한국인 1인극을 하기 시작했다. 넌버벌 퍼포먼스로.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 친구는 창피함과 웃김의 중간단계 표정을 들킬까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벌게진 얼굴에 입은 웃을랑말랑, 어깨는 들썩들썩.


"아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는 거야...ㅠㅠ"


잘 될 거라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간 건지. 내 몸은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축 처져버렸다.


으헝... 눈물이 터져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때,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웃으며 버스 운전기사가 타라며 손짓을 한다. 하.... 나오려던 눈물이 쏘옥 들어갔다. 처음 내가 말을 걸었던 그 청년은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쨋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신주쿠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1인극에 녹초가 된 나는 멍하니 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미안해하던 그 청년은 여기저기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나에게 다시 와 말했다. 내가 못 알아듣는 일본말로. 신주쿠 지도를 보여주며 일본말과 일본식 발음의 영어로 나에게 계속 무슨 말을 하는데, 나 역시 정말로 못 알아 들었다. 아까 내 모습이 이랬을까?


30여 분간 대화에 겨우겨우 해석한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신주쿠 버스터미널에 전화했으니 가서 물어보면 지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주쿠에 내리자 그 청년은 연신 스니마셍을 외치며 우리가 길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사했다. 우릴 태워준 버스기사 아저씨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신주쿠 터미널 인포메이션에 가서 내 상황을 설명하니 버스에서 지갑을 하나 주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지갑을 주웠던 그 가와구치코 역, 그러니까 우리가 어제 내렸던 그 숙소 앞 버스터미널에 맡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후지산으로 가야 했다. 시간은 이미 8시가 넘은 시각.


감사하게도 버스회사 측에서 후지산(가와구치코 역)으로 가는 표는 그냥 내어주었다. 친구에게 미안해 먼저 왕자 호텔로 가있으라 하고, 다시 두 시간이 걸려 그 정류장에 도착했다. 본인이 맞는지 지갑 모양을 설명하는데도 한참 걸렸다. 정말 일본 사람들은 기본적인 영어도 모르는구나.. 아. 고양이 그림이 그려있다고..!!! cat이라고 한 스무 번 말했을까...


"nonono..... 네꼬!!!"


결국 하루 만에 지갑을 찾았다. 다시 신주쿠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말 긴 여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꼬'가 일본말로 고양이란다.... 허허허




문제의 시골 터미널 가와구치 코 역...


처음엔 한국과 비슷하다 생각했던 일본이었다. 그러나 계속 스니마셍을 외치며 자기가 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그 청년, 쿨하게 우리를 태워준 버스운전기사 아저씨, 잃어버린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스템, cat을 '네꼬'라 끝까지 우기던 시골 터미널 아주머니.. 사건의 조각들을 재구성해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그 청년이었다면, 한국이었다면?



지루했던 도쿄 여행이 '지갑사건'으로 인해 아주 기억에 남는 여행으로 변모했다.

여행, 사건이 여행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2007 Mt. Fuji, Toky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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