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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간들, 내게 기대어

예술의 전당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전

by 구수정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여름 뉴욕 한 중고서점에서였다. 그녀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운명이라고 느꼈다. 타는 듯 강렬한 색채와 나를 응시하는 듯 두 눈동자. 고통스러운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그의 조각난 몸. 묘한 흥분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그 잔인한 표현력. 콤콤한 책 냄새 사이 그 많은 아트북 중에 하필 그 책을 펼쳐 보았을까. 화가라고는 뭉크, 피카소, 고흐 정도만 알았던 나는 그저 책 속의 작은 그림의 느낌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마력에 처음 빠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프리다 칼로. 그 이름을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녀를 더 알고 싶었고,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은 그녀의 삶만큼이나 많은 것을 담아내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는 큰 교통사고로 인해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겪는다. 리베라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도 녹록지 않았는데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 멕시코의 강렬한 빛과 구릿빛 피부, 푸석한 머릿결 그녀의 자화상은 고혹적이며 강렬했다. 눈썹이 갈매기처럼 붙어있었고, 눈빛은 목마름이 느껴졌다. 긴 목과 손가락은 그녀가 얼마나 우아한 사람인지 움직이지 않는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그땐 그랬다. 진정 예술가의 삶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고통만이 깊은 내면을 토해내도록 하는 것인가. 나는 그녀가 부럽지만 버거웠다.


덕분에 멕시코에 가보고 싶어 졌다. 멕시코의 환상은 온전히 프리다 칼로 그녀의 붓질 덕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멕시코에 가게 되었다. 2012년 가을 즈음일 것이다. 멕시코 칸쿤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을 때에도 프리다 칼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칸쿤에 도착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워낙 휴양지라 여기가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으니. 그러다 벼락처럼 그녀가 나를 일깨우게 만든 곳이 있었다. 바로 거대한 피라미드, 체첸 잇사를 앞에 두고서 였다. 새파란 하늘, 강렬한 햇빛, 주위에 걸어 둔 멕시칸 페브릭들. 그리고 그녀를 닮은 눈썹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 잊었던 꿈을 되찾은 듯 프리다 칼로, 그녀는 종종 다른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러다 바로 오늘 한국에서 그녀를 만났다. 실은 예술의 전당을 지나다니며 며칠 전부터 고대해 왔다. 지금의 나는 2008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나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사건들을 겪었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보내며 나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을 떠올렸다. 나보다 더한 고통들을 그림으로 치유했을 그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여인의 삶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한 세기를 뛰어넘어 멕시칸 여자가 한국의 여자를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기대었다. 그래서 얼른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진짜 그림을.


그리고 그때와 다른 게 하나 더 있었다. 함께 보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함께 공유하고픈. 그래서 그 친구에게도 위로를 전해주고픈. 흔쾌히 그 친구는 나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 주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문득 모조품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리베라 디에고의 그림은 어쩐지 와 닿지 않았다. 여전히 나에게 디에고는 칼로를 괴롭게 한 나쁜 남자였다. 그림도 당시 유명한 피카소, 모네 등의 화풍과 섞여있기도 하여 여러 여자들과 사랑을 나눈 줏대 없는 남자 이미지를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후훗, 내가 생각해도 참 주관적이다. 예술은 남겨진 자의 몫이니. 칼로에게 디에고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는데 디에고 없이는 칼로의 그림도 없었을 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디에고에게 면죄부를 선사하니 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프리다 칼로, 그녀의 고통은 도록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실물로 본 그녀의 자화상은 더 보태지도 줄이지도 않았다. 아름답게 꾸미려들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두드려 보고, 묻기도 답하기도 하며 그림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일관성 있는 화풍,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녀의 내면은 우주와 같이 넓었으나 미천한 육체는 따라주지 못하였다.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씨를 내보이는 과일들, 붉은 피, 자궁, 태아, 생명, 드러난 척추, 아름다움을 포기한 아름다움, 고통을 한 차원 승화시킨 그녀의 작품은 많은 시간을 서성이게 하였다. 그림에 투사된 듯 나의 자궁이 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혹자는 그녀의 그림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한다. 그러나 여성이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 편견, 시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나락으로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직관이 투영된 순결한 그림에서 한번쯤 쾌감을 느낄 것이다. 미화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당신을 어루만질 것이다.

내가 칼로의 붙은 눈썹이 너무 좋다고 하자 어떤 이가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칼로의 가느다란 콧수염이 좋다고. 실물의 그림을 보니 이제야 칼로의 콧수염이 보인다. 내 인생에서 긴 시간 동안 이렇게 끈질기게 접촉해온 예술가는 그녀가 처음이다.

그림 못지않게 칼로가 죽기 전까지 썼다는 일기장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그림을 구상하기도 하고, 디에고에 대한 마음도 담겨 있었으며, 낙서처럼 그린 그림도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그녀가 결국 발을 절단해야 하는 순간 남긴 구절을 하나 옮겨 본다.


왜 두 발이 필요해, 나에겐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1953 프리다 칼로.


@2008 Newyorkcity, USA

@2012 Cancun, Mexico

@2016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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