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e, Vietnam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늘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이 여행은 끝까지 잘 될 거라는 것을. 왜 그런 확신을 가졌냐고? 그냥 느낌이 그랬으니까. 우리는 넷이고 무서울 것이 없었으니까.
서로의 일정 때문에 따로 또 같이 출발했던 우리의 베트남 여행은 다낭에서 완전체가 되었다. 그간 이 여행을 위해 애쓴 마음을 하늘이 아는 듯 꽤 순조로웠고, 우기여서 출발하기 직전까지 날씨를 검색하던 우리는 이제 아예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올 테면 오라지. 우리는 넷이니까.
덕분에 먹구름을 가득 머금은 하늘은 우리의 일정에 차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밀당을 하며 비를 내려 주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스콜처럼 진한 소나기가 내리고는 문을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후에에 올 때도 그랬다. 후에로 출발하는 침대 버스에 오르자 꾸물 구물 한 방울씩 투척하던 하늘은 이내 우르르쾅쾅 하며 비를 내렸고, 아침 일찍부터 나선 우리의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놨다 하며 촉촉이 적신 운치 있는 베트남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길 두시간여...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우리가 예약한 글랜다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체크인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구글 지도에 의지하여 찾아간 글랜다 호텔의 호텔리어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해 차와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작지만 아늑한 호텔, 친절한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후에의 매력에 폭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심을 해결할 로컬 레스토랑을 추천받고, 짐 정리를 한 뒤 그녀가 추천한 보트 투어를 예약했다. 로컬 레스토랑 역시 사람이 많았다. 여기 베트남 사람들로. 오호! 좋았어. 관광객들로 둘러싸인 식당은 부담스러운 터였다. 진짜 이 맛이 베트남 맛일까? 그냥 우리 명동처럼 관광객의 경로에 들어선 (장사를 하기 위한) 그런 집이 아닐까. 그런데 여기 동네 사람들이 많은 집이라면, 왠지 제대로 소개받은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온 우리에게 보트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글랜다의 그녀가 추천한 보트 투어는 배를 타고 후에를 관통하는 강을 따라 주요 관광지에 내려 주었다 다시 타고 마지막에 후에 왕궁으로 가는 것이다. 배의 주인은 호텔에서 우리를 픽업하였다. 길을 나서자 인정사정 볼 것도 없는 오토바이들이 우리 발 앞을 슝슝 지나가기 시작했다. 혼을 쏙 빼놓고 온 몸이 얼음이 된 채 섰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직진하는 아주머니를 쫒아가면서 순간 우리 어디로 팔려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감이 생겼다.
"우리 보트가 아니라 큰 배 타는 거 아니야?"
"남중국해로 멸치 잡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결국에는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마구마구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깜짝 놀라 길을 건너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에모이~ 에모이~"
서둘러 앞서 가는 베트남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사태를 파악한 아주머니는 그제야 빵 터지신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꼴이 우습다. 길 건너편에서 초조한 몸짓으로 아주머니를 부르는 베트남 초보자들. 아무 표정 없이 앞서 가던 아주머니가 웃음을 터트리자 우리의 긴장감도 조금 누그려졌다. 멸치잡이 배는 아닌 모양이다.
아주머니의 배는, 아니 강변에 정차된 지붕이 있는 배는 우리가 호텔에서 본 용맹한 용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꽤 큰 배였다. 생활을 배에서 하는 듯 배 뒷머리에 조그만 방이 있었고, 크고 작은 빨래가 널려 있다. 배 안으로 들어서자 정성스레 열을 맞춘 네 개의 이동식 의자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이 배를 통째로 빌린 것이다. 우리가 이 정도야! 역시 자유여행의 묘미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우릉 우르릉 달달달 엔진 소리가 정겹다. 찰싹찰싹 바로 옆에서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릿한 강물을 가르고 가끔 큰 파도를 만나 배가 울렁거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누구랄 것도 없이 각자의 의자에 앉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뱃놀이를 즐긴다. 강둑에는 뿔이 길게 난 물소 떼가 목욕을 즐기고 있었고, 가끔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든다. 먹구름 사이 달달거리는 엔진 소리만 빼면 참 고요한 풍경이다. 아주머니는 그 모습이 낯선 듯 안절부절못하지만 굳이 이 분위기를 깨지는 못하였다.
"어멋 이거..!"
누군가 뱃놀이의 고요를 깨트렸다. 웃음을 터트리며 가리킨 그곳에는 편지가 있다. 배 앞머리에 있던 기념품 사이의 편지를 말이다. A4용지에 영어로 타이핑된 편지를. 잘 보이도록 누군가의 발 밑에 있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 후에에 온 것을 환영해. 후에는 참 아름다운 도시야. 우리 보트 투어가 너의 여행에 좋은 여행을 남기길 바라. 우리 가족은 배에서 생활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어. 여기 있는 이 기념품들은 우리 베트남 사람들이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이야. 질이 아주 좋아. 너에게는 아주 작은 돈일지 모르겠지만 이 기념품을 사주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된단다. 제품은 우리가 보장할 수 있어. 이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너는 더 큰 행복을 얻게 될 거야.
아, 이건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필요치 않은 물건은 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우리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그제야 아주머니의 불안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았다. 그녀는 익숙한 관광지 영어로 제품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여행지니까, 우리는 여행자니까 어느 정도의 호객 행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여행지에서의 호객 행위하고는 좀 다르다. 아마도, 우리가 베트남 오기 전 방문했던 태국 카오산 로드, 하다못해 수상시장 투어에서도 옷자락을 붙잡으며 적극적인, 때론 전투적인 호객행위가 익숙했다. 아니 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남대문, 명동만 가도 온갖 외국어로 "여기 맛있어""여기 싸""언니 여기로 와" 하며 손님을 붙잡지 않은가. 너무 그러면 좀 짜증 난다. 역효과다.
그런데 이런 점잖은 호객행위는 참 생소하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에 와서 그런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손님, 관심 있어? 애원은 안 해. 네가 필요하면 사. 뭐 이런 태도랄까. 다낭에서 반미를 파는 아줌마도, 과일을 팔던 할머니도, 글랜다의 그녀도 말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려고 했던 조그만 손가방을 골랐고, 어떤 이는 입체 엽서를 골랐고, 또 다른 친구는 책갈피를 골라 우리 네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참 소소하다. 그래도 아예 살 생각도 없었는데 이렇게 지갑을 연 거면 그의 편지는 꽤 위력을 발휘한 것 아닌가?
뉴욕의 한 맹인 거지 일화가 생각난다. 길 가던 한 사람이 거지의 돈 바구니에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글을 바꿔주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더라는. 마음을 흔드는 당신의 그 한마디로 우리는 후에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 양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는지 서운한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미소로 우리를 보낸다. 당당한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겠지. 그 높고 뜨거운 자존감에 박수를!
@2016 hue, Viet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