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잠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은 시대적으로 그 가치가 변화해왔다.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종교적 목적에 의해 제거되거나 생성되기도 하였으며, 형식적인 완벽함을 추구하기도 했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시대상과 철학을 유추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모든 것이 수레바퀴처럼 밀고 당기며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미적인 아름다움, 완벽성 너머의 가치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고 표현했다. 더러운 것, 추악함, 쾌감과 불쾌감, 덜 갖추어진 것, 실수와 헤프닝,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 소음과 불협화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예술에서 모두 담아내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완벽한 아름다움이야말로 거짓말로 포장된 것이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화성을 무너트리고 조금 불편하지만 일탈의 쾌감이 느껴지는 재즈가 탄생했고, 누군가는 신성한 미술관에 변기를 가져다 놓았고, 누군가는 넥타이를 잘랐으며, 피아노를 부수고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예술적 자유였다. 예술은 기득권의 노리개가 아닌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장애, 여성, 근로자, 어린이 등 소수를 대변할 수 있었고 미학적 확장이 이루어 지면서 메세지를 담은 예술의 진정한 역할을 찾아가게 된다. 여전히 불편한 지점은 있었으나 이 역시 인간이 가진 감정 중 하나이고 우리가 들여다 봐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이 같은 주장은 사회의 변혁, 민주주의, 자유의 개념과 맞물린다.
앞의 이야기는 실은 철저히 서양의 개념에서 바라본 것이다. 동양의 예술은 추구하는 지점이 매우 달랐다. 예를 중시했으며, 그 예는 다시 말하면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이든 신체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예술은 은유가 있고, 숨겨져 있으며 곱씹는 맛이 있다. 희.노.애.락.애.오.욕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만 그것을 더 아우르는 예술적 승화가 있는 것이다.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고 해학이 담겨있는 민요, 수묵화를 비롯한 회화,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은 이미 모든 감정이 하나로만 끝나지 않고 여러 감정이 섞이면서 나타나는 복합적 감정을 인지하고 계신 모양이다.
문제는, 바로 이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관점은 사회와 맞물려 있는데 내면적으로는 동양적 관점을 자신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으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추구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 이 혼란이 지금 '대통령의 풍자화'에서 폭발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눈은 동-서양이 혼재되어 있다. 그만큼 다양하게 바라 볼 수도 있고, 여러 의견이 나올 수도 있으며, 개인의 다양한 감정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이 떠들썩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감정은 무엇일까. 바로 '불쾌감'이다. 그런데 그 '불쾌감'을 작가(화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앞서 밝혔듯 예술의 본질은 모든 감정을 다루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작품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작가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이 불쾌하다고 작가에게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기 전에 왜 그 작품이 불편한지에 대해 들여다 봐야 한다. 감정은 본인의 마음속 무의식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교육, 부모와의 관계맺기, 자신의 기질, 속한 사회 등 자신의 온갖 경험들이 축적되고 결합되어 나오는 것이지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영화, 같은 연극, 미술을 보더라도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관객은 자신에게 왜 그런 감정이 나왔는지 돌아보면 될 일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하게 관객을 이끌지 못하였다고 잘못이 아니며 완전히 의도한 바로 이끈다 해도 그것 역시 오늘날 예술세계의 정신에 어긋난다. 북한의 정치영화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소설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작가의 손을 떠나면 관객의 몫이라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예술을 장소 구분하여 국회에 내걸지 말았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것 역시 또다른 검열, 블랙리스트, 편견이다. 예술은, 그리고 작품은 작품일 뿐이다.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주었으니 치워버리라는 말은 권력 남용이다.
다시 돌아가 이 풍자 그림은 왜 찬반논란을 일으키는 걸까. 일부가 느끼는-그러나 일부라 말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불쾌감에 대해 들여다 보자.
현재 한국 사회 다수의 여성들은 성 상품화, 성 대상화와 같은 지금까지 이 사회가 쌓아 온 여성의 이미지, 고용 및 경제구조에서의 여성차별과 각 개인이 겪은 경험들, 강남역 사건 등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혐오적 살인 등으로 불안감이 고조되어 있으며, 모든 감각이 쏠려 있는 상태이다. 당연히 명화라지만 여성의 몸을 대놓고 그린 그림에 자신들을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이를 여성들은 또 다른 여성혐오 사건이라고 보고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남성들은 지금의 대통령을 우리가 존경해마지않는 누군가의 딸, 몇십년간 그들 인생의 공주님으로서 자신의 공주님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 역시 감정을 투사한 것이다. 물론 그런 그 시대의 감정을 이용해 지금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말이다.
남성과 여성을 나누지 않고서라도 우리 민족(이 표현은 싫어하지만 역사성을 이야기하고자 겨우 고른 말이니 이해를 부탁 드립니다)이 내재된 예술의 미학은 앞서 밝힌 바 '예'를 갖추는 것이며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은근한 풍자, 곱씹음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시국풍자 그림'은 다수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편에서 미국이나 독일의 풍자를 이야기하며 '선진국은 저렇게 하는데' 라고 주장한다. '선진국'이란 말 자체도 문화상대성을 왜곡하는 말이며 그들과 우리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 또한 우리 스스로의 문화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런 문화 또한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니 작품은 그저 작품으로 보아야 하며, 자신이 그렇게 (스스로의 경험과 무의식을 통해) 불쾌감을 느꼈다고 작품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예술은 그야말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따질 것은 따로 있다. 법과 도덕성의 범위에서 말이다.
대통령은 공인이다. 연예인, 유명인과는 다른 공인이다. 대통령을 하고 있는 재임 기간 만큼은 그의 행적이 그를 뽑은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밝혀져야 하며, 그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이 선택한 것이다. 대통령 취임식날 선서를 하지 않는가. 대통령의 활동에 국민들의 가치판단은 당연한 것이며 이에 대한 비판, 칭찬, 풍자 역시 그의 몫이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박근혜 게이트'에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예술가는 예술로서 저항한 것이다.
그 화가가 대통령의 실제 몸을 정밀묘사 하거나 다른 몸매 좋은 여자를 합성한다거나 가슴과 둔부를 왜곡되게 그려 의도적으로 성적 대상화를 한 부분이 있다면 지탄받아야 한다. 페러디 했다는 <올랭피아>의 몸을 굳이 16세기 여성적 미의 상징인 비너스 몸으로 대체한 이유가 여기 있다면 비난할 여지가 있다. 그 그림을 보고 반대 성, 즉 남성들이 소위 말하는 섹스하고 싶고 꼴리게 그릴 목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 가지고 돈벌이나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 역시 범죄다.
그러나 작품에 세월호, 최순실 등 여러 풍자적 메세지가 있음에도 여성성에 관한 면이 부각된 것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고 싶은 부분만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아이들이 보지 말라고? 모자이크 처리 된 그림이 우습다. 아이들은 몸뚱이가 없는가? 몸뚱이를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미술관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잔인하다고 또는 야하다고 여성혐오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불편함이 있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는 그 불편함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한 것이고, 그 그림을 보는 이는 각자 다른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물론 그 페러디 작가(화가)를 프리다 칼로와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감정에 대해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나의 감정을 분석해 보자면 '재미있네. 그런데 사람들이 불편해 하겠네.' 였다. 나 역시 여성이고 박근혜 게이트의 중심에 선 모 여대 출신이자 예술활동을 하며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불쾌했던 것은 이 그림보다 노 전대통령을 코알라로 그린 풍자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 감정적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렇듯 각자의 감정은 출신배경이 같다고 같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은 아주 복합적인 개인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며 작품의 가치에게까지 확장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왜 그런 감정이 일으키게 되었는지 들여다보는 것 뿐이다.
표창원 의원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어떤 방향의 판단이든 여러분의 판단이 옳습니다." 이 말이 나는 어느 누구의 감정도 존중한다는 말로 들린다. 단지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유연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작품의 소재는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하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