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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Feb 28. 2022

전쟁은 그만

우크라이나에 신의 가호를

부모님과 어린 시절 살던 시골 옛 집 뒷마당에는 넓은 나무판으로 덮인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었다. 그 시절 하늘색 슬레이트 지붕 일색이던 시골 동네에 유일한 초록색 기와집이었던 그 집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큰아버지에게 물려받아 부모님이 신혼집을 차린 곳이다.

아주 어렸을 적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는 그곳은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뒷 뜰에 가기만 해도 엄마가 우다다 달려와 나를 번쩍 들어다 놓고는 했다. 조금 커서는 그곳이 너무 궁금해 몰래 들여다보곤 했다. 나무판 아래로 구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던 그곳. 처음에는 큰 집에서 본 것처럼 장독을 묻는 곳인가 했었다. 그러나 몇 년째 그곳은 비어 있었다. 게다가 장독을 묻기에는 너무 크고 깊었다. 아빠는 내가 몰래 들여다보는 걸 알았는지 어느 날 커다란 비닐로 덮어버렸다.


그 후 한동안 구덩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초2때인가 우연히 웅변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주제가 6.25. 대본도 직접 써야 해서 6.25에 대해 알아보다 구덩이가 무슨 용도인지 알아버렸다. 바로 전쟁이 났을 때 가족들의 대피처였던 것이다. 적군이 내려오면 구덩이에 죽은 듯 숨어 있어야 한다. 들키면 끝장이다. 바로 불구덩이가 되어버리던가 총알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하늘에서 폭탄이 우박처럼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구덩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해오는 어른들의 묘책이었을 것이다. 컴컴한 구덩이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부지했고 누군가는 들켜서 끌려갔을 것이다. 10살도 안 된 아이는 옛날 옛적 책 속에만 등장할 것 같은 전쟁의 잔해가 안락한 우리 집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공포감에 휩싸였다.

구덩이는 메워버리고 새 집을 지었지만 종종 악몽을 꾸었다. 전쟁이 나고 우리 가족이 매뉴얼처럼 구덩이에 숨었다가 들켜버리는 꿈. 그들이 총구를 들이미는 순간 땀에 쩐 채로 잠에서 깨었다. 아이는 생각했다. 전쟁이 나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 남쪽으로 가자.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 시절의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전쟁에 참전하는 아이 아빠가 딸과 생이별하는 마음, 애인의 미래를 알면서도 보내야 하는 마음, 80이 된 할아버지가 참전을 희망하는 그 마음, 이민 간 남자가 참전하기 위해 다시 국경을 넘는 마음. 우크라이나 국화인 해바라기를 머리에 꽂고 군복을 입은 여성의 용기. 초토화된 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 마음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21세기에 전쟁이라니.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상황에 숨이 턱 막힌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다.


금방 무너질 것만 같던 국가가 버틴다. 제일 먼저 도망갈 것 같던 이들이 전쟁 한복판에 서 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국민들은 제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문다. 일론 머스크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인터넷을 지원하고 해커집단  어나니머스가 러시아 국영 티브이를 해킹해 우크라이나 찬가를 틀어주는 전쟁.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서 전쟁상황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이웃나라 폴란드 국민들이 사재기해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지원한다.  버튼 하나면 도시 하나 초토화되는 세상일진대 서로의 이익과 관계, 암묵적 합의, 예측 못한 도움, 평화에 대한 갈망이 뒤엉켜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위기는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하나가 아니다. 자신의 터전을 지켜낸 모두일 것이다. 제발,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할 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전쟁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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