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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이 Dec 24. 2022

길 위의 오월_6

매우 방대하지만 티끌만큼만 사용하는 나의 소중한 행정학

지방에서 일정이 있을 때 종종 새벽에 집을 나선다. 깜깜한 새벽길에 빛이 새삼 고맙다. 내 인생이 암흑이라 느꼈을 때 나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을 느꼈다. 무언가 하기 위해서 새벽길을 열심히 달려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했다. 새벽의 빛은 그저 가로등이었을 뿐인데 그 빛은 마치 구원과 같았다. 밝은 곳으로 오라는 손짓 같았다. '새벽에 정말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 참 열심히 사는 거 같아.'. 사실 세상을 구하는 것 같은 그런 큰 일을 내가 꼭 할 필요는 없지. 세상엔 훌륭한 사람들이 잘난 사람들이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지. 나는 그런 일은 안해도 되지. 그저 나는 나의 일을 하면 되지. 티끌같지만 소중한 나의 일이지.

나는 행정학자이다. 비록 논문은 별로 많이 쓰지 못하지만.. 그래도 행정학자는 맞다. 행정학을 처음 배웠을 때 누군가 '잡학'이라면서 크게 쓸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잡학'인 것은 맞다. 행정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일단 통계학이 필요하다. 정부의 모든 성과는 통계로 귀결된다. 수학이 필요하다. 재정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성과를 측정하는 모든 과정에 수학이 활용된다. 경제학이 필요하다. 국가 경제를 잘못 예측하면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인 것이 되고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없고 그러면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하기 어렵다. 사회복지학도 필요하다. 어려운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외에도 필요한 학문은 정말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철학이다. 공무원이 행정을 하고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은 행정에 대한 철학이다. 행정철학이라 부른다. 행정철학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행정철학은 모든 행정의 기준이 된다. 잡학은 대부분 실용학문이다. 행정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크게 쓸만한 곳이 없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쓸 데가 없다면 나는 일할 곳이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정말 티끌만한 일이지만 티끌은 어디에나 있다. 티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나는 늘 일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행정학을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행정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정학과를 지원한 내게 아버지는 '행정학과 잘 지원했어. 잘 될거야.' 라고 격려해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언제나 믿어주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털끝만큼도 안한 딸이 어려운 가계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딸의 막장 같은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들어주려고 애썼다. 어머니를 설득해주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행정학'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버지의 예측은 맞았다.


행정학을 했기에 공직에 입문하였을 때 적응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행정의 흐름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직에 있었을 때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은 행정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행정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행정학을 하길 참 잘했다. 나의 소중한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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