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새로움과 듣기의 추억
아주 오랫만에 전철 선반에 신문이 놓여있는걸 봤다. 문득 예전엔 너도 나도 신문을 보고, 내리는 역에 선반에 얹어놓고 내리면, 다른 사람이 그 신문을 다시 집어 읽었다는 기억이 났다. 기웃기웃 옆 사람이 보는 신문에 롯데가 또 얼마나 황당한 성적으로 졌는지, 국회는 또 얼마나 오래 파행인지 보면서 가곤 했다. 지하철 방송에선 신문 두고 내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좀 있다가 무가지가 나왔다. 메트로만 기억이 나는데 십수종의 무가지들이 쓰나미처럼 나오면서, 전통적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역시 남이 내린 신문을 집어 다시 읽고, 내가 낸 광고가 몇면에 잘 실렸나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다 읽은 신문을 수거하는 노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젠 아무도 신문을 보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드문데 반해 신문은 자취를 감췄다. 다들 스마트폰을 보며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즐긴다.
신문의 시대에는 ”오늘 아침 신문에 나온 xxx 기사 봤어?” 라는 질문이 트렌드체크가 될 수 있었다. 이제 그 기능은 포탈이 하고 있다. 포탈의 검색어 순위는 개개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양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다보니 뭐 봤어? 라는 질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다우니가 검색어 1위를 차지했을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것처럼 검색어 순위가 높아도 그건 내가 모르는 사실인 경우가 다반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대해 전혀 불편함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세상이 아주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문은 내가 읽고 남도 읽도록 공유하는 매체다. 지금 스마트폰에서 나만 알고 재밌어하거나 고민을 하고 마는 정보들이 예전엔 신문을 통해 공유되었다. 남이 두고 간 신문을 집어 보면서 또 자신 역시 그 신문을 두고 내려 남들과 공유를 실행한다. 지하철 안에서 세번 네번 공유된 신문들은 구깃구깃해지더라도 꽤나 값어치를 했다. 왠만한 모든 신문사가 다 적자라고 해도 그 부분만큼은 자부심을 가질만 한 것이었다. 지난 백년간 정보의 제공, 확산에 신문이 한 기여가 얼마나 컸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래서 나쁜점도 있었다. 메이저 신문들의 논조와 관점이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이 되었다. 그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좋은 기사들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휘했다.
이제 신문은 스마트폰 안에 들어왔다. 내가 보고 두고 내린 신문 따위 없다. 동시다발적으로, 어느 시간대와 장소에서도 같은 기사를 읽을 수 있다. 그걸 나누고 말고는 상상도 하지 않을 일이다. 내 스마트폰의 기사 노출은 내 옆 사람과 아주 다르고, 내 관심에 따라 배열되는 이야기들은 공동의 지식과 이해의 세계를 대체했다.
미디어가 손 안으로 들어오면서 세상은 더 다양하게 개인화 됐다. 재밌는건 전 시대의 신문들이 부르짖던 독자의 알권리,독자를 배려한 뉴스, 독자를 위한 컨텐츠를 이제 강제로 실행하고 있단 것이다. 조각조각 갈라진 정보소비의 패턴은 신문에게서 여론을 만드는 펜의 힘을 앗아간 대신, 개인화된 정보의 양과 깊이를 만드는 큐레이션의 능력을 주었다.
여전히 신문은 역할과 기능,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 속에 헤매고 있다. 유익한 컨텐츠 프로바이더로만 정의하기엔 공공성이 너무 크고, 공익을 위한다기엔 사심이 너무 많다. 그럼 대체 무엇을 하는 매체여야할까? 내 개인적 소견으로는 그 이름처럼 독자들이 또는 유저들이 새롭게 듣게 하는 일을 잘 하면 좋겠다. 무엇을 새롭게 들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새롭게 듣게 할 덧인가, 진짜 새롭게 듣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나 새롭게 듣게 할 것인가..
신문 한장이 상기시켜 준 출근길의 변화를 생각해보며 참 오래, 꾸준히 살고 있단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