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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탈 Sep 07. 2020

회사의 비전을 안다는 것

회사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지만

회사를 꽤나 다녔지만 회사에서 직원들 상대로 이야기 하는 것 중에서 제일 쓸모없다 생각했던게 비전, 미션 공유 교육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 입사했던 회사에서 전 임직원 대상으로 실시했던 그룹의 철학과 비전에 대한 교육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그때 제일 많이 비웃었던 시니컬한 불만 세력에 아마 나도 포함될 것이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개념의 개념의 개념을 화려한 언어의 휘장 뒤에 깔아 놓고, 신형 스마트폰 언박싱처럼 요란하게 터뜨리는게 그 당시 유행이어서, 그룹 핵심부에서 내려온 그 놀라운 언어의 유희의 결정체들은 그래봤자 허황된 소리 아니냐 싶은 생각을 하게 딱 좋았다.

수십억 컨설팅 받은대로 떠든다고 과연 뭐가 될까? 하는 생각에 남 얘기려니 하며 교육 시간이 정말 지루했고, 이럴 시간에 일이나 좀 하게 해 주지, 보고서 야근해서 써야하는데 교육 받으면 밤샘해야 겨우 마칠거 아니냐며 광광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게다가 몇년 후에 주가가 얼마가 되고, 매출액이 얼마에 종업원은 몇명이나 되어서 어쩌구 저쩌구..그게 나한테 와닿지 않았다. 기껏해야 드는 생각은 그래서 나는 얼마나 승진할 수 있을까? 혹은 그래서 연봉은 얼마나 많이 줄건데? 이런 지극히 개인의 이익에 관련된 것 몇가지.


내 연봉이 얼마며, 승진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떠들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그래도 연봉이 좀 오르려나? 나도 과장,부장, 임원 할 수 있다는 건가? 하는 희망 같은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는 것 자체가 일단 회사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다닐 만 한 회사라는 시그널이었음을 아주 오래 지나서 알게 됐다.

회사가 몇년 후에도 같은 모양새일 것이고, 몇 년 후에는 과연 내 자리가 온전하기나 할 지 의문이 드는 곳이었다면 비전이나 미션 같은 교육은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사 할 만 하고, 충분히 성장하고 이익도 낼 수 있는 계획과 역량, 자신감이 있으니 비전이니 미션이니 하는 것을 전 직원들 대상으로 신나서, 자랑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불평불만 세력들도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좀 더 버텨 볼까? 나한테도 기회가 오나? 그래도 연봉은 좀 더 오르겠네? 와 같은 개인의 영달에 관련된 상상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비전이니 미션이니 만들어서 교육시켜 봤자 다 소용없어요, 관심도 없어요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대부분 회사의 장밋빛 미래가 바로 내 삶에 직결되지 않는다. 내가 그때까지 다닐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고, 제시하는 미래 자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수도 있고, 회사가 아무리 돈 잘 벌고 유명해져도 그러나 저러나 내 처지는 똑 같을것 같고, 나를 갈구는 상사나 이해 못 할 관련 조직들의 진상짓들은 여전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내 처지가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미래 따위 없이, 오너가 원하는대로, 경영진의 변덕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내일 당장 회사가 문닫거나 어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을 감수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커리어를 계속 가져간다는건 가장 어리석은 일이므로 빨리 한탕 하고 떠야겠다, 몸값을 올려서 다른데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는게 당연지사다.


회사의 하이어라키는 회사라는 집단의 비전을 개인화시키도록 작용한다.(작용해야 한다)

대표이사는 임원들에게, 임원은 중간리더들에게, 중간리더들은 직원들에게 차례차례 비전을 현실성 있고 개인의 일과 관련시켜 상상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전의 내재화다.

그런데 비전의 내재화는 상상도 못할 만큼 어렵다. 비전을 이야기하려 하면 오너 일가의 비전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난 지금 품의서를 써서 하찮은 프로모션이라도 하나 하려고 버둥거리는 말단일 뿐인데? 라는 생각을 거의 모든 계층에서 한다는걸 금방 깨닫게 된다.


어렵게 기회를 잡아 물어보면 오너나 대표와 가깝다고 하는 임원들도 비전의 공감대 형성이 썩 잘 된거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어 반복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느낌이라 결국 이 사람들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어김없이 스스로는 완벽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조직 구성원들을 동기화하는데 실패한다.


요새는 직원들이 그냥 "우리회사는 뫄뫄뫄라는 비전이 있어"에 만족하는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 망하지 않고 성장할 미래의 청사진을 갖고 있고, 잘 되면 나도 어쩌면 지금보다 좋아지겠지 하는 수준에서 비전을 인정하는거다. 사실, 그 정도만 되어도 직원이나 중간관리자급의 내재화는 성공이다. 회사가 만든 거대한 미래가 개인화되어 설득력있게 전달되고 모티베이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좀더 큰 그림을 상상하고 그려내며, 아름다운 디테일을 조각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중간간부 레벨까지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뿌려놓은 꿀을 따라 가는 일개미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걸 하루하루의 과업으로써 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큰 그림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직원들이 매일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많은 꿀을 먹고 있고, 내일은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면 비전의 공유가 성공했다는 뜻이다. 설령 개인적 차원의 해석이라 할 지라도.

비전을 만든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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