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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Jul 01. 2023

멀고 아름다운 곳(遠美)의 사람들

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어 집어 들었다.

만화 <원미동 사람들>. 소설가 양귀자가 1980년 대에 부천시 원미동에 살면서 겪었던 이웃 주민들과의 삶의 교류, 소시민들의 일상 등을 초라하지만 비루하지 않게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만화로 옮긴 책이다.

원미동에서 살았던 적은 없지만 원미동에 위치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간 다녔으니 나도 반쯤은 원미동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동네가 학교에서 걸어서 15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막상 그 동네에 가본 적은 몇 번 없었다. 소설이 발표되었던 1987년에는 원미동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도 그때는 그런 소설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한참 후에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진 후에야 소설 속 원미동이 내가 아는 그 “원미동”임을 깨닫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오랜만에 ‘원미동’을 보니 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미(遠美)”가 ‘멀고 아름다운’이란 의미인 줄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만화책이라 그런지 페이지가 잘 넘어갔다. 서울에서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원미동에 작은 연립을 사서 이사 온 ‘은혜네’가 주인공이지만 형제슈퍼 김반장, 강남부동산 박 씨, 땅부자 할아버지 등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 우리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 같기도 하고, 언젠가 원미동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친근하다.

좀 더 읽다 보니 왜 낯설지 않은 지 알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전세 살다 오르는 집값을 감당 못하고 부천으로 떠밀리듯 이사 오는 사람들. “탈 서울 엑소더스”가 요즘에 나타난 현상인 줄 알았는데 30여 년 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동네 슈퍼 옆에 새로운 할인슈퍼가 생기면서 제살 깎기 경쟁을 하다 결국 망하고 마는 자영업자의 에피소드도, 하루 종일 일해도 최저 임금 밖에 못 받고, 공장도 지하, 집도 지하 단칸방이라 지하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원(工員)의 하루 이야기도 요즘에 나온 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현재의 삶과 닮아 있었다. 하긴 36년 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200년 전에 쓰인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2,000년도 더 전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를 읽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장면들을 대하면서 깜짝 놀라곤 했다. 삶의 규모는 달라졌지만 사람들의 본질은 현재와 너무나도 비슷해서다.


한편으로 ‘인간은 발전하지 않는 건가’라는 생각에 절망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나빠지지도 않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 30여 년 전에 원미동에 위치했던 학교에서 자원의 매장량과 앞으로 사용 가능한 기간이 얼마나 짧은 지 등을 배우면서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 다른 매장지나 보다 효율이 높은 발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고, 대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등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고, 만들어 가는 것. 이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자 재능이다. 덕분에 2,000년 전 관중과 백리해가 살아남았고, 200년 전 파우스트도 결국 구원을 받았다.

현재도 그렇지만 빈부의 격차가 더 심각해지고, 인간의 노동력이 점점 가치를 잃는 미래는 더욱 살기 어려워질 거라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인류”는 우리가 처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몇 천년 전에도 “요즘”은 예전에 비해 살기 힘들다며 현세를 비관하고 그 이전 시대를 ‘황금시대’라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래를 낙관하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절망하고 불안에 떨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인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인간은,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아서 “잘” 살게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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