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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Jul 09. 2023

한 여름에 즐기는 우리나라 와인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으로 잘 알려진 이육사(1904~1944)의 시, <청포도>입니다. 시처럼 칠월인 지금, 포도밭에는 한창 포도가 익어가고 있겠지요.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源綠)입니다. 스물이 갓 넘은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지요. 이후 중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됩니다. 이때 수인번호가 264번이었기에, 육사(陸史)를 호로 택했다고 합니다.

그는 1929년에 출옥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던 중에도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고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였지요. 1934년에 귀국하고 나서야 시를 쓰는데 전념하고, ‘육사’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시 <청포도>는 1937년에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발간한 <자오선>이라는 문집에 실린 시입니다.

칠월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익어가는 포도. 굳이 청포도인 건 산뜻하고 시원한 맛과 풍요로운 이미지 때문이겠지요. “주저리주저리, 알알이”를 소리 내어 읽어 보니 통통하게 익어가는 포도가 떠오르며 입안에 상큼한 신맛이 가득해집니다. 포도가 다 익을 때쯤 오실 손님, 그 손님께 대접할 포도가 맛있게 익었으면 좋겠습니다. 손님이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손이 젖을 나의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얼마나 귀한 손님이기에 그냥 깨끗한 쟁반도 아닌 은쟁반에 깨끗한 모시 수건을 깔아 대접한다는 걸까요? 제가 손님이라면 정말 감동받을 것 같습니다. 

평소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소재를 다뤄서 일까요? 읊다 보니 언젠가 한 여름에 방문했던 남국의 포도밭이 그려집니다. 포도 넝쿨 그늘 아래 식탁에서, 손님이 되어 와인을 마시며 웃고 떠들던 시간도 떠오릅니다. 그냥 읽는 <청포도>에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포도밭의 모습,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기쁨, 설렘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청포도>는 평화와 기쁨 이상의 시라고 배우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청포도>의 손님은 그저 포도밭을 찾아오는 귀한 손님이 아니라 조국의 광복을 상징한다고 배웠지요. 아이에게 손님 맞을 준비를 시키는 건 ‘손님(광복)이 올 것을 확신하는 예언자적 태도’라고 배웠고요. 바로 시인 이육사가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는 시입니다. 시를 시대적 틀에 가두고 해석을 정형화하는 건 아름다운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육사는 독립운동가였지만 동시에 훌륭한 시인이었습니다. 오늘만큼은 <청포도>를 그의 고향 “안동”에 대한 사랑과 그곳을 찾아올 귀한 손님을 맞을 설렘에 관한 시라고 생각해 볼까요.


264 청포도 와이너리


육사의 고향, 안동 퇴계마을 길목에는 '시인' 이육사의 설렘이 담긴 포도밭이 있습니다. 그를 기념해 이름도 ‘264 청포도 와이너리’이지요. 264 청포도 와인의 원료는 ‘청수’라는 품종의 포도입니다. 청수는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품종인데요.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맛과 향이 뛰어나 소비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국내 와이너리에서 청수로 만든 와인이 세계적인 와인 시상식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와인트로피’*

사실 264 청포도 와인의 역사는 오래되지는 않습니다. 몇 년간의 연구 개발이 있었지만 실제로 판매되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인데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경북도민체전, 21세기 인문가치 포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등 주요 행사에서 만찬 건배주로 사용되며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264 청포도 와인의 맛은 어떨까요? 청수 품종으로는 스위트와 드라이 와인 모두 만들 수 있습니다. 스위트는 아이스와인만큼 단 맛은 아니고 약간 달다는 느낌이 나는 정도입니다. 세미 드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드라이한 와인은 살짝 쓴 맛이 나는 정도로 두 가지 모두 가벼운 산뜻한 맛입니다. 스위트한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살짝 부족한 단 맛이지만 우리나라 와인이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이육사의 아름다운 시를 담은 와인이라 그런 걸까요. 어쩐지 귀한 손님을 기다리는 설렘이 함뿍 담겨있는 듯한 상큼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맛이냐구요? 직접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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