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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S Jan 02. 2021

12가지 인생의 법칙 by 조던 피터슨

1장~5장

서문


  조던 피터슨 교수는 근래 몇 년 동안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 중에 한 명이다. 그가 2018년에 출판한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30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300만 명이 넘고 시청 수는 총 1억 회가 넘어간다. 사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란 제목은 어찌 보면 조금은 식상한 면이 있다. 왠지 다른 많은 자기 계발서가 그러하듯 뻔한 이야기들을 서술해놓았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피터슨 교수가 영미권 질문 응답 사이트가 쿼라(Quora)에서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약 40여 개의 목록을 답글로 달았고 그 글이 아주 많은 공감과 인기를 얻었고 그것이 이 책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한다.



1장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3억 5천만 년 전부터 지구 상에 존재했던 바닷가재는 아주 단순한 신경회로를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과학자들이 인간처럼 복잡한 신경회로를 가진 생명체를 연구할 때 바닷가재를 이용한다. 바닷가재는 단순한 신경회로를 가지고 있지만 행동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매우 흡사하다. 예를 들어, 바닷가재는 바닷속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서식한다. 그들은 같은 종끼리 서식지와 먹이를 두고 경쟁한다. 인간사회가 그러하듯 바닷가재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질 좋은 서식지는 제한적이고 그것을 원하는 개체 수는 많다. 그래서 바닷가재들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때로는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다. 전투를 통한 승자는 좋은 서식지를 차지하게 된다. 즉, 승자는 집단의 상위층에 속하게 되고 패자는 하위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스스로 약하다고 믿는 바닷가재들은 전투 자체를 피하고 하위층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다. 모든 종들이 수억 년 전으로 거슬러가면 결국 한 생명체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인간은 손은 고래의 지느러미와 박쥐의 날개는 그 골격구조가 비슷하고 심지어 뼈의 개수도 같다. 이를 말미암아 볼 때, 단순한 신경구조를 가진 바닷가재 집단이 가진 계급적인 특성을 인간 또한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사회의 계급제도는 사회의 산물이 아닌 생물학적인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서식지를 두고 벌인 전투에서 패배한 바닷가재는 자신감을 잃게 되고 겉모습은 위축되어 보인다. 그 바닷가재는 다시는 전투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렇게 바닷가재 사회에서 하위층으로 밀려난 채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바닷가재 사회에서 상위층에 속한 개체는 질 좋은 서식지를 차지하고 많은 암컷들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사회 또한 비슷하다. 상위층에 속한 사람들은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지에서 지내면서 질 좋은 교육을 받지만 하위층에 속한 사람들은 위험하고 위생적으로 취약한 주거지에서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직업을 가지고 겉보기에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반면에 하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위험하거나 비위생적이며 낮은 봉급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겉보기에 어깨가 처져있고 근심 걱정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하다 보니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는 반면에 하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타인에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 개체의 계급적 운명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상위층과 하위층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그 개체들의 뇌 속에 세르토닌과 옥토 파민 수치를 보면 된다. 자신감인 넘치는 개체의 뇌 속에서 세르토닌의 수치가 높고 옥토파민의 수치가 낮다. 자신감이 없는 개체의 뇌는 그 반대이다. 바닷가재를 상대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자신감을 잃은 채로 더 이상의 전투를 회피하고 있는 바닷가재에게 인간의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주입함으로써 세르토닌의 수치를 높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바닷가재는 다시 예전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서식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개체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 또한 어떤 일에 도전하거나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구애를 했다가 실패했을 때 큰 좌절을 느끼고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오래가서 다시는 도전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게 되고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또한 겉모습도 어깨가 처지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게 된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후에 일이나 결혼 그리고 대인관계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그럼 이렇게 상처 받기 위해서 도전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실패가 남기는 후유증이 이렇게 크기 때문에 차라리 도전을 하지 않고 갈등 상황을 피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저자는 이 장의 끝 무렵 이렇게 말한다. “더 좋은 서식지를 차지하기 위한 개체 간의 경쟁은 인간이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생명체 안에 있던 것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경쟁에 맞서라. 그리고 패배하더라도 다시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시 도전하라”. 그렇게 한다면 패배로 인해 줄어들었던 세로토닌의 수치가 다시 상승할 것이고 다시 도전할 용기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며 이 장을 끝맺음한다.      



제2장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00명이 똑같은 약을 처방받는다고 가정하자. 일단 3분의 1은 약국에 가지도 않는다. 나머지 중의 절반은 약을 받아가지만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장기이식을 받은 환자들 중에도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서 힘들게 받은 수술을 무마시켜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에 자신의 부모나 친구 심지어 반려견이 아프면 지체하지 않고 병원에 데려가고 약을 제대로 복용하도록 독려한다. 마치 자신보다 타인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듯하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피터슨 교수는 제2장에서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서 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시도한다.

  하느님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 동산에서 살고 있었다. 그 시절은 자의식과 타인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는 무해하고 순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하와가 하느님이 먹기를 금기시한 선악과 열매를 먹고 자의식이 생겼고 바로 아담도 먹도록 설득하였다. 그렇게 인간이 자의식이 생기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고 다른 생명체와 그리고 사물들을 구별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못난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동산에서 추방하고 노동, 난산, 육아 등 힘겨운 인간의 삶을 그들에게 형별로 내렸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하던 최초의 인간은 자의식을 얻고 하느님과 분리되게 된다. 이때부터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종으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자신은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고 무능함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과 분리된 이후에 인간은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런 인간이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에덴의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다시 하느님을 마주하고 함께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은 부끄러움 자의식을 떨쳐내고 당당한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잘 알고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라고 말했다. 이 장은 성경의 <창세기> 내용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관련 내용에 배경지식이 없거나 종교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잘 읽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의 뛰어난 고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저자가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3장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사람이 지금보다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관련 주제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는 캐나다 중부의 앨버타 주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곳은 겨울이 길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기후를 가진 곳이다. 그래서 친구가 무척이나 소중하다. 저자에게는 몇몇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무척 똑똑하고 재능이 많아서 저자의 생각에 커서 무언가 큰 인물이 되어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났고 나중에 그 친구들이 저자의 자취방에 와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의 몰골은 저자가 어린 시절 그들에게 품었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하고 술을 자주 마셔서 반 정도 정신이 나간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그 친구들은 왜 고향을 떠나지 않을까?’하고 의문을 품는다. 저자 자신은 작은 마을이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누군가는 도전하고 누군가는 안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저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가 선하거나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타인을 도우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영심이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고 주장한다. 또는 타인에게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런 동기들로 타인을 돕는 것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 아주 유능한 팀에 무능한 직원을 보낸다. 그 동기는 무능한 직원이 유능한 팀에 가서 좋은 점들을 많이 배우는 것이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대부분 그 직원은 그 팀의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아주 좋은 학급에 문제아를 보내면 그 학급의 분위기는 망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문제에 빠진 사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본인이 그곳에서 나오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를 돕는 사람은 장기적인 보살핌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시간 낭비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을 주변에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또 그들은 성장하는 우리를 보고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저자는 냉소적이고 나쁜 습관을 많이 가진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열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쉽다고 말한다. 우정은 상호 합의이다.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우정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을 주변에 둔다면 그 사람은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행동을 냉소적이고 파괴적으로 했을 때 좋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주변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의리는 친구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가 행동을 나쁘게 했을 때 그의 주변을 떠남으로써 경각심을 주는 것이 진짜 의리일 것이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행동을 바르게 하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두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이 성장하는 길이다.      



4장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 하고만 비교하라


  우리는 모두 내면의 비평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능력, 하는 행동 및 결과 등에 대해서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타인과 비교를 함으로써 행해진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사회는 능력에 따라 직업이 배정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비평가는 각자에게 적합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해서 그들이 잘할 수 있는 찾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무능한 의사, 변호사, 그리고 예술인들이 꽤 많다. 이들은 그들의 내면의 비평가의 목소리를 귀담아서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른 대가는 일단 본인들이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괴롭고 그들의 처지를 받는 사람들도 피해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비평가의 목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쓸데없이 사람들을 낙담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를 오랫동안 열심히 연습하여 30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5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지만, 내면의 비평가는 ‘너보다 잘치는 사람이 이 도시에서만 4명이나 있고 더 넓은 곳으로 가면 훨씬 더 많을 거야’라며 그의 오랜 노력을 폄하한다. 이럴 때는 우리는 내면의 비평가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게임이다. 각자가 자신의 인간관계, 직업, 그리고 내면의 폭군 등과 펼치는 수많은 게임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여정에서 “인생이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와 같은 허무주의 철학이 성행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고 최고의 선을 행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목표를 높게 잡고 세상과 부딪혀라. 때로는 목표를 낮추고 인내하라.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게 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아 간다.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알기에 남들의 시선과 삶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그렇게 개개인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면 이 세상도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당신과 비교하라.



5장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요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훈육할 때 처벌하는 것을 망설인다. 혹시나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때리거나 모진 말을 하는 것을 꺼린다. 그 결과 아이는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배우지 못한 채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가정당 아이의 수가 줄어들고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어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맞물린다. 아이들이 한계를 모르고 부모에게 때를 쓰거나 밤에 잠을 안자고 노는 것은 전형적으로 훈육 부족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결과 아이는 사회에서 적절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양육에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이런 악순환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훈육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아기는 순수한 존재이며 커서 잘못되는 것은 양육과 사회 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이다. 아기는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된 양육과 교육을 받지 않으면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아기는 다른 아기보다 유별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아이들은 훈육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장에서 피터슨 교수는 자신이 실제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일들을 예시로 제공한다. 피터슨 교수가 아이를 키울 당시에 이웃들과 육아 품앗이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모임을 함께 한 다섯 가정의 아이들을 돌아가면서 한 번씩 봐주는 것이었다. 한 번은 피터슨 교수의 부부가 아이들을 책임지는 날이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은 피터슨 교수의 집에 데려다주면서 '아들 녀석이 밤에 잠을 잘 안자고 떼를 씁니다. 그럴 때는 만화 영화를 보여주면 돼요'라고 말을 전했다. 실제로 피터슨 교수 다섯 가정의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할 때, 그 아이는 잠에 들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터슨 교수는 만화 영화를 보여주지 않고 아이와 힘겨운 사투 끝에 겨우 아이를 잠들게 만들었다. 성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들은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먹어야 건강하다.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훈육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는 없다. 성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더욱 밤에 힘이 남아서 쉽게 잠들려고 하지 않는다.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습관을 들여줘야 한다. 잘 교육받은 네 살 아이는 젊잖고 예의가 바르다. 그래서 어른들과 또래 친구들에게 사랑받는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훈육하는가에 따라서 그 아이의 미래는 크게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네다섯 살이 되어 사회로 나갔을 때 어른들과 또래들에게 사랑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할지 아니면 관심을 못 받는 아이로 시작할지는 부모의 훈육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자신의 아이가 사회에서 잘 살아가길 바란다면 체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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