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35
연차를 내기도 전,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올해 제대로 된 해외를 나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마침 가격도 저렴했다. 어차피 남아있는 연차는 많았다. 비행길에 오르고 일주일 정도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10월이었으나 날은 더웠고 나는 대부분 반팔로만 돌아다녔다. 거의 10년 만에 가본 일본은 생각만큼 낯설지 않았으나, 생각만큼 익숙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여행이었다.
그렇게 여행하고 돌아와서 들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재미있게 잘 다녀왔다? 잘 쉬었다? 아니 어느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쓴 돈들을 정리했으며, 다음날 출근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아 돈이 좀 아깝긴 하네', '이제 몸이 좀 힘드네'라는 말을 건조하게 내뱉고만 있었다.
여행은 낭만이다. 낭만은 돈과 시간의 낭비, 쓸데없는 것에 대한 찬사, 필요 없는 것, 그리고 언젠가 미화될 수 있는 기억이 버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젠가 미화될 수 있는 기억. 내가 아직도 16년도의 나를 그리워하는 건 여행을 했던 내가 이미 미화되어 강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한 번에 썼다는 그런 낭비. 어찌 보면 쓸데없을지도 혹은 인생에서 마이너스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삶을 멀리 보고 효율을 추구하는 건 낭만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낭만이었던 여행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사실 여행뿐일까? 태어날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나를 쌓아 올렸던 그 아름다운 탑이 사실은 낭만과 환상으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철골이 사라진 건축물같이 이미 균열이 이미 가서 보수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여행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내 옆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니 흥미도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계속 잡아두어야 한다. 그 흥미가 오래가고 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이게 바쁘니까 저게 바쁘니까, 그렇게 미루고 미뤄버리면 재만 남게 된다. 나는 추운 겨울 그 재 옆에 하염없이 앉아서 언제 따뜻해지지 라는 말만 되낼 뿐, 재 속으로 아무리 장작을 넣어도 다시 타지 않는다는 것을. 무언가 계속 타오를만한 연료를 꾸준하게 넣었어야 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점점 고립되고 있다. 한 줌 휘발유에 불을 붙이며 이건 나의 평생을 태울 낭만이야 라고 말하던 나를 반성한다. 그 한 줌 휘발유가 세상이 나에게 허락한 조금의 친밀함이었음을. 이제 그 세상을 직시하였을 때, 세상은 이미 등 돌리고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버리고 만 것을. 세상은 나에 대한 문을 닫고 있음을.
세상이 발자국에 남긴 동정 하듯 남긴 몇 방울의 휘발유를 찾아다녀야 할까? 아니면 몸을 착유기에 던져 나온 기름에 마지막 불을 붙일지. 후자라면, 세상이 나를 되돌아봐줄지, 아니면 정말 나의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 모두 태울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문을 열어두지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