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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Feb 11. 2022

두 학자 이야기

존 윌리엄스, 『스토너』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분명 실존한 것 같지만 존재한 적 없는 허구의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있었을 리 없어 보이나 분명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리고 두 이야기가 있다. 소설이라는, 혹은 논픽션이라는 장르적 규정이 없었다면 분명 실제와 허구를 착각했을. 두 이야기는 어떤 지점을 관통하며 엮이고, 또 명확히 갈라진다. 그 시작은 땅이다.    

 

윌리엄 스토너 – 있음 직한 허구의 인물     


윌리엄 스토너는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인 그에게 처음 주어진 운명은 “열일곱 살 때 이미 어깨가 구부정해”질 정도로 일을 돕는 것. 그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과묵에 가까운 묵묵함과 평생 가난을 견뎌낸 인내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흙과 먼지와 가난의 공간 속 그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찾아온다. 스토너는 농과대학에서 새로운 농사법을 배워 돌아오기 위해 ― 흥미 없는 교육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그는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는 듯” 부모에게 재차 묻는다. “정말로 제가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컬럼비아로 떠난다.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대학 건물을 보며 그는 “놀라움과 감탄 속에서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낀다. 

 농과대 커리큘럼과 별개로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 강의를 듣던 스토너는 최초의 “고민과 고뇌”를 경험한다. 그는 곧 그것이 “대학에 온 이유”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작품들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 줄 열쇠” 되어줄 것처럼. 그의 운명은 최초의 고민,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그에게 말을 거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단어들과의 끈질긴 대면, 그 과정에서 새롭게 “자신을 의식하는 방식”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다. 문학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학자의 길을 걷는다. 근근이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부모의 척박한 땅을 벗어나, 스스로 내린 최초의 결정을 통해. 

 스토너의 삶은 아주 고요하고 질긴 투쟁이었다. 삶의 굴레, 소소한 비극과 묵직한 슬픔과 간혹 찾아오는 행복의 뒤엉킴. 우리 삶과 다를 바 없는 지난한 그 투쟁을 버틸 수 있게 그의 중심에서 꿈틀대며 무한한 동력을 제공한 것은 이것이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 

 결코 충분하지 않은 삶에서도 그는 오직 이것으로 충만했을 것. 만약 스토너의 일대기에 대한 헌정사를 쓴다면 그것은 그 자신만이 쓸 수 있었을 테다. 그 자신 외에는 누구도 그의 삶을 바꾸지 못했으므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 – 믿기지 않는 역사적 인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 과수원”, 그러니까 오직 땅과 햇빛과 비와 바람의 힘으로 한 해를 살아내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밤하늘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익혔고, 마을부터 지구까지 섬세한 지도를 만들고 그렸으며, 꽃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외웠다. 오직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 ― 열역학 제2법칙에 속박된 세계 ― 에서 과학처럼 혹은 일종의 예술처럼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에 몰두했던, 그는 설화 속 영웅들처럼 시작부터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비범한 청년으로 자라난 데이비드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가장 유명한 박물학자였던 루이 아가시의 캠프에 소속되어 페니키스 섬을 탐사할 수 있게 된 것. 루이 아가시가 분류학에 헌신한 이유는 자연 속에 숨겨진 “신의 생각”과 “도덕적 가르침”, 절묘한 질서를 찾아 진보할 방법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명백히 우월한 생물과 단연코 하등한 생물의 분류. 이렇듯 자연에는 신이 만든 명백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신성한 사다리” 개념은 훗날까지 그의 제자 데이비드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데이비드는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어류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일에 미친 듯이 매달린다. 끊임없이 새로운 어류 종을 찾아냈고, 사랑을 찾아 결혼을 했고,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오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속도는 자연스럽게 그를 높은 위치로 끌어올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열정과 뚜렷한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 혼돈이 그가 쌓은 작은 질서들을 무참히 무너뜨렸을 때, 그러니까 자연재해가 연구실을 덮쳐 그가 평생을 바친 모든 결과를 망가뜨렸을 때나 질병으로 아내를 잃었을 때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는 일, 그러니까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질서를 만들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할 수 있었다. 그는 힘겨운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혼돈에 맞서 그가 세운 질서는 더욱 찬란히 빛났고,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아니 적어도 문명이 유지되고 역사가 지속되는 한 칭송받을 것만 같았다.    


고요한 몰락과 승리한 추락     


땅에서 시작된 두 인물은 생애에 걸쳐 거의 같은 태도를 공유한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하는 삶. 두 인물 모두 자신의 것을 뜨겁게 사랑했다. 스토너에게는 문학이 있었고, 데이비드에게는 어류가 그 대상이었다. 물론 사랑은 짓궂어서 언제나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그들의 삶에도 어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고, 두 인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스토너는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패하고 체념했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 결국 단념해야 했던 진정한 사랑, 부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커리어.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자, 이번엔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응전은 학문에 대한 고집에서 비롯됐다. 그는 그가 평생 열정을 쏟았던 학문에 대하여 조금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았다. 부족한 능력임에도 교묘하게 특권을 누리려는 학생에게 자격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사안에 대하여 권력이 행사하는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스토너는 명백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어깨는 점점 더 굽었”지만 그는 묵묵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누군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지만 말이야, 젠장,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이 아니야”라는 탄식의 말뿐이었다. 그의 삶 마지막까지 권선징악도, 통쾌한 역전승도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절망도 후회도 없이, 그는 그렇게 기꺼이, 몰락했다. 우리는 멀리서 그의 몰락을 읽으며 조용히 전율 ― 사실은 전율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그저 잔잔한 감정의 곱씹음, 혹은 한탄 ― 했다. 

 반면 데이비드는 인생의 대부분에서 성공했다. 데이비드는 그의 열정에 흥미를 느낀 스탠퍼드 부부의 제안으로 스탠퍼드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한다. 그의 나이 “갓 마흔 살”이었다. 그는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더욱 승승장구한다.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혼돈이 막아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그의 “자기기만” ― 실패에도 불구하고 장밋빛 전망을 볼 수 있는 능력 ― 은 정도를 벗어난 우월주의가 되고, 그의 뜨거운 열정은 막을 수 없는 광기로 변질된다. 데이비드는 그를 견제했던 제인 스탠퍼드의 수상한(정말이지 너무나 수상한)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을 모호하게 덮는다. 그는 “우생학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들이마시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수많은 정책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적합”해 보이는 사람들을 “박멸”하는 일에 앞장선다. 그의 인생에도 치명적인 반전은 없었다. 그는 많은 이의 존경을 받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빛났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혹은 괴물. 그는 승리했지만 한없이 추락했다, 아니 승리하기 위해 기꺼이 추락했다.      


두 인물의 삶이 말해주는 것     


인생 역전의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던 소설은 큰 흔들림 없이 고요한 결말을 맺는다. 전반부까지 위대한 인물의 일대기인가 싶었던 논픽션은 비판적 탐사보도로 변주된다. 두 이야기가 남긴 약간의 혼란과 실망감, 무기력함과 찝찝함 속에서, 이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과묵하고 단조로운 삶이었지만, 스토너는 “탐험가”였다. 그의 최종 목적지가 신대륙이나 열대우림이 아닌 “웅장한 대학 도서관”(『스토너』)이라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반면 생의 많은 시간을 광활한 자연 탐사에 바쳤던 데이비드는 오히려 자신을 비좁은 사상의 동굴 속에 가두고 고집스럽게 파고든 학자였다. 동일한 종류의 열정으로 시작했던 두 인물. 어느 순간부터 그 생애의 결은 완전히 어긋난다. 스토너는 몰락을 예감하여 기꺼이 나아갔고, 데이비드는 추락이 두려워 비껴갔다. 스토너의 것은 빛바랜 애정으로 스러졌고, 데이비드의 것은 지독한 광기가 되어 살아남았다. 스토너는 실패했고, 데이비드는 성공했다.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가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스토너』) 하나의 삶과,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 위대한 박애주의자의 정원”에 “수백 명이 다녀”(『물고기』)간 또 다른 하나의 삶. 두 인물의 삶을 곱씹으며 우리는 묻는다. 스토너와 데이비드,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경고성 교훈담인가? 아니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범?”(『물고기』) 우리 생의 굴곡마다 슬쩍 떠오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우리 삶의 태도가 될 테다.

 그리고 이건 실없는 헛소리. ‘스’토너와 ‘스’타 조던, 스 씨 집안엔 바보같이 고집스럽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다만 스 씨 집안의 조상들은 데이비드를 보며 ‘우리 집안엔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할 것 같다. 맞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스타’는 본인 스스로가 가져다 붙인 별칭이자, 성실한 고집과는 다른 오만한 아집의 다른 이름이므로. 


부기 1) 

역주행의 신화를 썼다는 『스토너』는 평범한 인물의 잔잔한 삶을 어떤 깨달음의 경지까지 밀어 올린, 단연코 최고 수준의 소설이다. 은은한 물결처럼 보이지만 세차게 마음을 흔드는 이 이야기는 어쩐지 느지막이 진가가 발견된 이 소설 자체의 운명과 비슷하다.      


부기 2) 

데이비드의 일대기를 통해 희망의 빛을 찾다가, 더 거대한 혼돈에 빠졌다가, 결국 자신만의 깨달음을 발견해낸 『물고기』의 저자 룰루 밀러의 삶은 아쉽게도 차마 다루지 못한 채 뒤로 미룬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의 선언을 옮겨 적으며 결국 데이비드가 세운 기괴한 질서를 무너뜨린 그녀의 “그릿”(『물고기』)에 멀리서 박수를 먼저 보낸다. 감히 말하건대, 그녀의 책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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