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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Dec 05. 2021

너무도 유전자적인 유전자의 새끼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2018) 40주년 기념판

하필 또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는 일에 대하여     


 이미 올해 출간된 그의 신간 『신, 만들어진 위험』을 읽었다. 도킨스의 말마따나 “우리의 시야는 수 세기에 걸쳐 팽창했”(『신, 만들어진 위험』, 342쪽, 김영사)다. 도킨스의 문제작 『이기적 유전자』가 나온 지 40년, 그날과 오늘의 간격 사이에 과학과 이론은 분명 무서운 속력으로 변했을 테다. 분명 속도가 아니라, 속력이다. 정의에 대한 고민도 정방향에 대한 감각도 없이, 돌이킬 수 없을 빠르기로, 그저 무자비하게 사방으로 나아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1976년으로 돌아가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문제작 『이기적 유전자』를 뒤늦게 읽는 것은 널리 알려진 그의 이론에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깊이 동감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려 고민하던 중 우연히 눈에 띄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단순하고 강렬한 제목에 끌렸기 때문―그러니까 가혹할 정도로 ‘이기적’인 행위들의 생물학적이고 불가역적인 이유를 어렴풋이라도 이해해보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만약 이 책을 읽은 게 마지막 이유 때문이라면, 나는 목적 달성에 처참히 실패했다. 

 아이가 또 죽었다. 정확히는, 아이를 또 죽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맹목적 유전자와 순응적 개체


 선뜻 집어 들기 어려운 두께의 책이지만 이 거대한 이론서 한 권을 관통하는 주제는 비교적 단순하다. “성공한 유전자”, 즉 살아남아 복제하여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해낸 유전자는 모두 ‘이기적’이라는 것. 모든 생물은 DNA라는 ‘자기 복제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이라는 준엄한 심판을 견디고 세대를 거쳐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개체(우리가 흔히 생물이라 부르는 것들)를 먹고 자고 번식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유전자는 오직 생존만 추구하는 “의식이 없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이고, 그렇기에 생물학은 어떠한 도덕적·윤리적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되며,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되어 죽고 오직 유전자만이 영원할 뿐이다. 

 도킨스는 생물의 가장 기본 단위를 유전자로 설명한다. 물론 유전자가 개체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직접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전자가 짜놓은 생존 프로그램에 따라 적절하고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설계돼있다. 인간의 뇌, 치타의 다리, 사자의 이빨과 꿀벌의 날개까지, 개체의 모든 것은 유전자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신체의 내, 외부로 표출된 “표현형”에 불과하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 오로지 번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여왕개미와 노동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개미, 수컷 한 마리가 수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바다표범의 습성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유전자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으로 채택되어 오랜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아 이어졌을 뿐이다. 자연선택 앞에서 유전자는 맹목적이고 개체는 순응적이다. 그렇기에 진화는 경이로운 비극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주의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가르는 것은 “생존 가능성”이 작용하는 방향이다. 생물학적으로 나의 행동이 너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경우를 ‘이타적’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이타심의 근저에는 언제나 나―더 정확히는 내 유전자―의 세대 전달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즉 내가 너에게 잘해주면 너로 인해 내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일이 가일층 안전해지는 것. 같은 종의 무리 생활도, 서로 다른 종의 공생도, 어쩌면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인간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온전한 이타주의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의 치밀한 전략일 뿐이며, 우리는 단지 이타주의라는 망상에 의존해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살아남고 있다. “보편적 사랑이나 종 전체의 번영과 같은 것은 진화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은 유전자의 존재 이유가 생존뿐 아니라 전달에도 있다는 것. 하나의 개체에만 머무는 어떤 유전자의 생존은 일시적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스스로 복제하고, 복제한 자신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면서 세대를 이어 영원히 존속하고자 한다. 그것이 번식의 의의다. 우리의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각각 절반씩, 조부모로부터 그 절반의 절반씩, 그 위의 세대로부터 또다시 절반씩 이어져온 유전자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최고의 이타주의(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인 부모의 양육은, 지극히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새끼에게 전달된 내 유전자가 안전하게 생존하고 복제하여 그다음 세대에 이어지도록 돕기 위함이다. 개체의 번식과 양육은 영원을 위한 유전자의 전략적 행위다. 동물의 생태계에서 생존 가능성이 낮은 새끼를 버리거나, 때론 죽이기까지 하는 것도 그런 전략 중 하나다.        


진과 밈과 전략적인 ()새끼들      


 생명과 진화의 근원으로서의 이기적 유전자론을 냉철하게 단언하는 도킨스지만, 그 역시도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어떤 종류의 희망을 말한다.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며, 결국 의식적 존재로 진화한 인간은 유전자의 명령에 저항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인간은 언어, 의복, 음식, 관습, 예술, 기술 등 ‘문화’를 향유한다. 도킨스는 “역사를 통하여 마치 속도가 매우 빠른 유전적 진화와 같은 양식으로 진화”하는 이 자기 복제자를 문화의 전달 단위, 즉 ‘밈(meme)’이라고 명명한다. ‘모방’의 의미가 포함된 그리스어 ‘미메메(mimeme)’를 유전자를 뜻하는 ‘진(gene)’과 유사한 발음으로 줄인 말이다. 어떤 문화는 인기를 얻어 모방되며 퍼져 나가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때론 전달 과정에서 변형된다. 한편 어떤 문화는 엄중히 통제되거나 엄격히 금지되어 사라진다. 결국 인간은 밈을 통해 유전자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의식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구별 짓는다.

 인간은 ‘진’과 ‘밈’이라는 두 지배자의 명령을 받든다. 그러나 인류의 희망을 철저하게 좌절시키는, 오로지 유전자의 명령에만 너무 충실했던 인간의 사례들이 자주 들려온다. 이를테면 그들의 유전자를 도려내 영원히 폐기하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고 절망적인 사건들.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에서 양모가 생후 16개월 딸을 상습적으로 학대해 숨지게 했다. 

 지난 6월 경남 남해에서 계모가 13세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여 숨지게 했다.

 지난 7월 경기도 화성에서 양부가 생후 33개월 딸을 폭행하고 방치해 숨지게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저 비극적 사건들에 가까스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을 적용시켜본다. 아이는 감수 분열된 나의 생식세포를 통해 유전자가 전달되어 태어난 개체가 아니므로, 아이는 내 유전자의 생존-복제-전달과는 하등 관계가 없고, 그렇기에 나는 저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며, 만약 나와 나의 유전자 반쪽을 전달받은 친자식들의 생존과 번영에 조금이라도 불편을 준다면, 나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혹은 죽여도 괜찮다는 것. 오로지 유전자의 전략에 충실한, 인간이길 포기한 유전자적인 새끼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말한다.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라고. 우리는 적어도 존재 이유와 삶의 방식을 고민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생물이다. 그래서 지적 생물이자 의식적 존재이길 스스로 거부한 비인간적 사건들에 더 깊이 좌절한다. 인간은 그저 이기적 생물일까. 그러나 자신의 유전자와 아주 거리가 멀었을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이들이 대신 울었고, 많은 이들이 대신 사과했다. 이 눈물과 사죄는 오로지 의식적 생물의 것이자, 우리에게 ‘밈’이 있다는 증거다. 제멋대로 해석하자면 모랄-메메(moral-meme), 즉 ‘도덕 유전자’다. 밈을 통해 유전자의 명령을 거스른다. 사피엔스, 오직 사피엔스만이 그럴 수 있다. 생물적 관점과 인간적 고민 사이에서 애써 희망을 찾는다. 우리는 비록 가끔씩 작고 작은 모습으로 돌아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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