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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Oct 28. 2021

너, 선생, 당신들에게 바치는

한강,『소년이 온다』(창비, 2014)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218명이 죽었다. 5월 이후로 사라져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은 363명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다는 사람이 있고, 그보다 적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섬세함을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 숫자는 흐릿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산 자는 흐느낀다. 그런 광주에도 5월이면 봄이 찾아온다. 광주의 봄은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고 또한 스쳐 지나가는 계절도 아니다. 제자리를 맴돌며 자꾸만 머무르려 할 때 물리치거나 기억하려 애쓰는 계절이다. 수없이 많은 정치인, 언론인, 학자가 물리치려 애썼고, 수없이 많은 예술가, 작가, 시민이 기억하려 막아섰다. 그 지난한 다툼의 과정에서 작가 한강이 썼다. 나는 그 처절한 기억의 작업물을 뒤늦게 읽는다. 

 소설이 가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애써 무시할 수 있는 소설이 있고 도저히 모르는 척 비껴갈 수 없을 듯한 소설이 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소설은 대체로 너의 비극과 나의 불편함과 우리의 부채감을 골고루 다룬 작품이다. 『소년이 온다』는 어느 방향으로도 도망칠 수 없도록 여러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다, 혹은 들어야 한다. 

    

너에게 닿기 위하여     


“친구 찾으려고”(13쪽) 왔다는 중학생 동호는 어쩌다 보니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손을 거들게 된다. 아무리 초를 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시취로 가득한 공간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친구 정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비극적 상황. 죽음이 머무는 공간 밖에서는 이미 더 많은 죽음이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이제 겨우 “변성기가 시작”(16쪽)된 중학생에게는 모든 상황이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럽기에, 그의 이런 질문은 어쩌면 당연하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17쪽) 집회에 나선 어른들은 처절한 목소리로 목청껏 대답한다. 그들이 “진상을 전국에 밝”히고, “우리 명예를 회복”(22쪽)하기 위해서 죽었기 때문이라고.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 작전이 있던 밤, 서둘러 귀가하라는 주위의 권유와 가족의 재촉에도 동호는 결국 도청에 남는다.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처럼, 죽는다. 어린 소년은 왜 죽음이 도사리는 그곳에 남았는가. 억울하게 떠난 ‘너’에게 닿기 위해서다.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나아가다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탄환”(59쪽)이 박혀 죽은 너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기에,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남았을 테다. 우리는 그렇게 죽을 각오로 반드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시민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그 소년들을 쐈던 이들에게 보다 더 날카롭게 향해야 한다.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58쪽) 그들은 왜 총구를 시민에게 돌렸지.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눈 군인들을 향해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117쪽)던 광주의 시민의식이 묻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대답은 차디찬 공허와 뜨거운 울분만을 남겼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전두환, 2003년 SBS 인터뷰 중) 수십 년이 흐른 후 남겨진 것은, 겨우, 그것이다. 그렇기에 동호는, 광주는, 시민의식은, 일찌감치 친구를 찾았더라도 결코 그곳을 떠나지 못했을 테다.     


말하기 듣기 쓰기그리고 읽기     


생존보다 오히려 죽음이 간절해지던 순간, 그 끔찍한 생지옥의 시간을 묻고 답하는 일은 쓰라린 고통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은 겪어낸 자, 살아남은 자 들에게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108쪽)될 삶의 고비다. 그 아픔을 듣는 일은 기억하려는 자, 싸우려는 자 들이 통과해야 할 슬픈 제의가 된다. 그 과정을 함께 견딘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광주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그날의 광주를 알고자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132쪽)던 생존자의 기억과 감정을 감당하며 묻고 기록했던 이들이 있다. 반드시 해야 할 고통스러운 일을 앞서서 하는 그들이 우리의 ‘선생’이 된다. 

 국가 권력에 의한 대학살의 현장에서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87쪽)지만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삶이 고통이 돼버린 그들은 각자의 선생에게 살아남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선생은 선생이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122쪽) 여겼던 이들의 마음을. 그러니까 삶의 모든 걸 뒤로 하고 차라리 죽음을 향하는 그리움을. 모진 고문과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씨팔, 존나 영화 같”(133쪽)던 그날의 이야기를, 선생은 묵묵히 듣고 견딜 수 있었을까.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이 괴롭고, 잊는 것만큼 기록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선생이라 함은 그런 기억을 부채감으로 함께 견뎌주는 사람이자, 선명한 재현과 정확한 기록으로 복수하는 사람일 테다. 그리고 읽는 이가 있다. 처참한 진실의 기록물을 펼쳐놓고, 차마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이 소설이 허구의 창작물이기를 바라면서, 몇 번을 다시 읽고 또 몇 번을 잠시 멈추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도저히 선생이 될 수 없었을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분명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135쪽)라고 내게 물었다면.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끝내기 위해     


『소년이 온다』에 끔찍한 과정은 있고 아름다운 결말이 없다.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의 그날 이후 40년이 흐른 오늘, 그러니까 2014년 출간 당시 “매우 암울해 책이 나오면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나올까 우려”해야 했던 상황까지도 견뎌내 민주주의가 습관처럼 말해지게 된 오늘, 그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감히 뭉뚱그려 정의한다면 이 소설은 죄책감의 이야기다.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았음을 괴로워하는 이야기. ‘당신’이 죽었던 것은 당신 옆의 ‘너’를 위해서다. 다만 그렇게 살아남은 ‘너’는 아마도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갈 테다. 누군가는 맞았어야 할 총탄이 사방에서 날아들 때 나 대신 당신이 총탄을 맞은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은 내가 당신을 쏜 것일까 물으면서. 서로를 쏜 적이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죄하는 이야기는 비극이다. 죄가 없으니 반성할 수도, 죄책감이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을 때 우리의 다짐은 대체로 이렇게 단호하고 슬퍼진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45쪽)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다시 작가의 마음을 생각한다. 이 소설은 왜 쓰였는가. “이 책을 읽는 젊은 세대, 어린 학생들에게 광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한강, <이데일리> 인터뷰 중) 작가가 작품의 방향을 막연히 결정하는 방식이 마냥 달가운 건 아니지만, 작품을 쓴 작가의 마음이 이렇다면 우리는 이번엔 그 의도대로 작품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 작가의 역할은 그저 “관문”을 열어주는 것일 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마침표를 찍어 닫는 일까지는 우리의 몫이라는 것. 우린 아직 끝내지 못했으므로, 따라서, “다음 추도식”(9쪽)은 계속될 테다. 

 충실한 재현이라면 슬프고, 과장된 서사라면 빈틈이 없다. 작가는 남은 이들의 바람대로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211쪽)었다. 슬픔도 치밀함도 한강 소설의 몫이다. 한강에 뛰어드는 사람이 한 해에 500명이다. 작가 한강의 작품에 스스로 투신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듯싶다. 물론 마음 넉넉히 구조된 사람이 대다수일 테다.      


+ 부기

그리고 정말 우연히도,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와중에 광주의 봄을 끔찍하게 만들었던 주범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죽음을 앞둔 그가 “5.18 희생에 대한 과오를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평생 육체의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이 아니라 공허했고, 죽음 후에 남의 입으로 남겨진 전언이라 희미했다. 그는 충분히 오래 살았고,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

 그런 그의 장례가 국가의 이름으로 치러진다고 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애도가 국민 통합과 화합에 기여할 거라고. 글쎄. 5월의 광주, 태극기로 감쌌던 관들, 그 속에 누워있던 수백 명의 “죽은 몸들”(17쪽)에게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의 권한으로 그의 자리를 마련해도 괜찮겠냐고, 혹시 그를 용서할 수 있겠냐고. 국가는 더 아프고 더 고결한 죽음 앞에 먼저 예우를 갖춰야 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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