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구마 Dec 08. 2022

문학과 철학, 노래

유난히 여운을 남기는 노래들이 있다. 4분가량의 한 곡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맴도는 노래. 13인조로 활동했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 같은 노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세대를 주름잡으며 인파가 모이는 장소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곡이나, 중독성 강한 후렴구가 반복되며 ‘수능금지곡’이라고 불리던 후크송은 머리보다는 차라리 입에서 맴도는 노래다. (물론 이러한 노래도 대중의 사랑을 받은 충분히 훌륭한 음악이지만.)


반면 음계의 높낮이나 박자의 빠르기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생각을 붙잡고 멈춰 세우는 노래들이 있다. 내게도 이런 노래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나는 이런 노래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얼마간 고민한 끝에, 그 노래들에 문학적 혹은 철학적 노래라는 엉성한 이름을 붙여본다. 나는 문학적 노래와 철학적 노래를 거의 매일 아껴 듣는다.


문학적 노래,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부르기

  

노래는 곡조에 가사를 붙여 만들어낸 음악이다. 어떤 노래를 성글게 반으로 떼어낸다면 크게 음률과 노랫말로 나눠진다는 뜻이다. 멜로디와 리듬의 아름다운 조화를 분석할 능력이 내겐 없으니 먼저 나를 붙드는 노래는 좋은 가사가 있는 노래다. 가사는 텍스트로 이루어져있고, 텍스트는 문학의 주된 재료이므로, 가사가 있는 노래는 문학의 한 분류가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개방일 뿐, 모든 노래가 문학인 것은 아니다. 많은 노래들이 문학―되기에 실패하므로, 문학이 되어버린 노래는 내게 유난하다.


온종일 거리는 잿빛에 잠겨

잠은 더하고 시간은 얼만큼 지났는지 지금 비가 와

사람들 제각기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고

아- 누군가 나를 부르듯 지금 비가 와


문학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어떤 아름다움에 대하여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말하는 노래가 있다면, 그 노래는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김현철의 1집 앨범 수록곡 <비가 와>. “온종일 거리”가 “잿빛에 잠겨”있는 날, 그 적막함 속에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릴 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을, 마침내 “잠”에서 깬 ‘나’는 절절히 느끼고 있다.


감추고 싶은 기억들이 다시 밀려와

비가 와 나의 젖은 가슴에

오 그날처럼 비가 내려와     

- 김현철, <비가 와>


“철없”는 것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인지, 덧없이 그리워하는 ‘나’인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비구름이 몰고 오는 기억 속으로 “자꾸 쓸”려갈 수밖에 없다. 빗줄기는 멈추지 않고 그리움은 거세진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리움에 맞서지 않는다. 노래하는 이의 사명이 으레 그렇다는 듯, 슬픔에 잠겼지만 비탄에 빠지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밀려”오는 “기억들”을 빗방울처럼 맞으며 노래할 뿐이다. 비처럼 세찬 그리움을 어엿하게 맞이하는 노래를. 덤덤히 슬픈 가사가 나를 붙잡으면 위로하는 멜로디가 뒤따라와 나를 놓아주므로, 이런 노래 앞에서 나는 자유롭게 오래 머문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한편, 스스로 자신의 마음은 “읽기 쉬운 마음”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의 태도에는 한심한 체념도 수상한 음모도 없어 보이기에, 상대는 큰 고민 없이 “스윽 훑고” 갈 생각으로 다가올 수 있을 테다. 당신이 다가올 수 있다면 나의 장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사람. 거짓이 없으므로 내 마음을 쉽게, 마음껏 읽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투명한 사람. 그런 사랑의 방식은 매우 흥미롭지만 동시에 생소하므로, 어쩌면 상대는 그 생소함에 물려 언젠가 떠나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그런 상대의 걱정을 짐작한 듯 후렴구에 덧붙이는 노랫말이 압도적이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이별이 사랑을 “추억할 그 밤” 정도로 바꿔간다 해도, 사랑했던 순간을 책갈피처럼 꽂고 “남몰래 펼쳐”볼 수 있을 테니, 우리는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노래. 사랑을 “미루진 않”아야 한다는 노래의 부드러운 강요에 ‘주저하는 연인들’은 기어코 설득 당하고 말 테다. 이처럼 대책 없는 사랑을 섬세하게 가창하는 순간 노래는 이미 한 편의 순수 문학이다.



철학적 노래,

삶을 고민하고 죽음으로 나아가기

 

다음은 철학적 노래. 철학이란 낱말은 학문을 넘어서 일상까지 침투해 존재한다. 철학이 한결 가벼워졌으므로 우리는 이제 철학에 대하여 무겁지 않게 말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애초에 불명확했던 철학은 각자가 내리는 정의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철학이라는 말을 써놓으면 떠오르는 몇 단어들을 늘어놓고 천천히 배열을 맞춰본다면, 내게 철학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일 정도로 정의된다. ‘잘 살고 잘 죽는’ 유용한 방법론에 관한 단순한 고민이 아니다. 삶은 문제이고, 죽음 역시 불가피한 문제라는 체념적 고민이다. (이 이상의 세련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나의 한계에 대하여 철학적 회의감이 들기도 하는 바.)


세상이 내게 묻는다

지금껏 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고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삶이었냐고


“덤벼라 건방진 세상아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며 자신의 방법(노래)으로 세상에 맞선 사람이 있다. (<나의 노래>) 세상은 삶이 진행되는 시공간적 배경이므로, 세상에 맞서는 일은 결국 자신의 삶의 평탄한 진행을 비튼다는 각오일 테다. 세상과 맞서는 순간 그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언짢아질 테고, 스스로 삶을 비틀어버린 이의 여생은 이내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 이렇듯 남루해진 삶을 향해 세상은 “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며 조롱하듯 “다그친다.”


조금은 게으르고 그래서 가난했지만 적어도 나는 정의로왔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세상의 물음에 삶은 일단 변명하듯 답한다. “적어도 나는 정의”를 품고 살아왔다고. 그러나 삶의 답변은 어쩐지 스스로가 확신이 없어서,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이렇게 덧붙인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우리가 아는 한 세상은 잔인하고 집요하므로 삶의 궁색한 변명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를 몰아붙일 테다.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린 삶은 변명마저 포기한 채, 이렇게 외치고 말 것.


결국엔 나도 똑같다

정의가 있네 없네 잘난 척 하고 있지만

일억만 주면 닥칠 것이다

입금하라 정말로 닥치는지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입금하라>


“결국엔 나도 똑같다”, 그러니 “입금하라.” 이 직접적이고 적확한 문장 앞에서 우리의 삶은 변명도 체념도 벗어던진다. 홀가분해진 삶 앞에서 정의와 윤리와 이상의 비판은 무용하다. 삶의 귀천은 스스로가 정하기 때문이다.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가 되어 “내 인생의 영토”가 “주공 일단지”정도로 축소되었다 해도, 배달 중 한때 사랑했던 그녀를 마주칠까 두려워하며 “찌그러져 있을”지라도, “언젠가 다시 기타를 사”고 노래하며(<치킨런>) ‘입금’되는 날을 꿈꾸는 이는 그의 삶에서 무궁히 귀하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삶의 중간에서 싸움을 각오하는 노래가 있다면, 삶의 끝에서 화해를 고민하는 노래도 있다. 철학적 명제를 대놓고 드러내는 노래를 만나면 어쩐지 주춤하기 마련이지만, ‘생의 끝’으로 향하는 길에서 언젠가는 만나게 될 질문이라면 피할 도리가 없을 것.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세상의 질문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된다. 누군가는 당당하게 말할 테고, 누군가는 자신 없게 웅얼거릴 것이며, 누군가는 결국 답하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모든 삶은 제각각 오답투성이므로, 그들의 답변은 반드시 오답에 가까울 테다. 이렇듯 도저히 답을 맞힐 수 없는 문제를 낸 어떤 대담한 출제자는 모범답안에 이렇게 쓴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 무한궤도,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 존재의 의미는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삶의 끝에서 그저 “후횐 없노라” 말하기.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이처럼 당당하게 죽음으로 나아가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불가해한 삶과 화해하는 방식이라고. 스스로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띄워 보낸 후(自問), 죽음 앞에서 답변을 스스로 내놓는(自答) 노래가 있다. 철학은 질문하고 사유하여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나가는 ‘무한궤도’의 자문자답이므로, 이런 노래는 인생의 4분 6초만큼의 깊은 철학이 된다.


철학을 노래하던 가수들은 각자 귀한 삶 속에서 자문하며 치열했고, 각자 몰랐던 죽음 앞에서 자답하며 고요했다. 그들은 철학을 노래했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 철학하며 살았기에 노래하며 죽었다. 위대한 문학과 철학처럼 위대한 노래도 영원히 남는다. 나는 영원히 들으며 죽어갈 노래들 앞에서 자주 슬퍼진다.


#차구마 #차구마컴퍼니 #문학 #철학 #노래 #김현철 #잔나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신해철


매거진의 이전글 시인만이 시를 쓸 수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