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프랑스』(더블북, 2022)
“너는 선을 못 그려.”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림을 좀 가르쳐달라는 나의 부탁에 먼저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던 친구가 꺼낸 말이었다. 핸드폰에 찍어둔 사진 한 장을 켜놓고 나름 최선을 다해 따라 그린 나의 작품을 잠시 살펴보던 친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이. 익살스럽게 대꾸했지만, 사실 친구의 스스럼없는 웃음과 날카로운 일침에도 섭섭한 감정이 생겨날 리가 없었다. 학창시절 도화지에 대충 무언가를 문질러놓고 장난치며 흘려보낸 미술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재능도, 열심도 없었던 사람의 이른 배신을 뒤늦게 받아줄 만큼 미술은 만만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 그 무관심의 대가가 삐뚤삐뚤한 나의 선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점, 선, 면, 색과 채 등.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단순한 요소들을 조합하면 가끔씩 예술이 발생한다. 이제는 그 ‘가끔’의 빈도가 훨씬 잦아졌지만, 어쨌거나 예술은 여전히 남의 일. 어떤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 독창성, 오묘함, 성스러움, 정치적/사회적 메시지 따위를 전달하거나, 혹은 어떤 작품을 음미해 그것들을 발견해내는 일은 생활과 거리가 멀다. 그러한 예술의 분야 중 가장 조용하고 내성적인 구성원이 미술이므로, 미술은 우리와 괜스레 더욱 어색하다.
호랑이를 만나려면 동물원에 가야 하듯, 미술과 만나려면 미술관에 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단 몇 차례의 관람 경험이 전부인 미술관은 아직 내게 침묵과 비밀의 공간이자 역동성 없이 침잠하는 공간이다. 미술관에서는 침묵하며 비밀을 살펴야 하고, 침착 속에서 사색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 그런 공간에 무턱대고 입장하기엔 조금 두렵다. 그래서 친절한 누군가가 보내준 “멋진 초대장”을 먼저 펼쳐본다.
친해지고 싶지만 아직 어색한 사이인 미술과, 선을 못 그리는 나의 만남에 다리를 놓아줄 책,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프랑스』를 읽는다.
어쩌면 문제는 막연한 경외심. 감상을 위한 미술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다.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으며, 우리는 그 좋은 작품의 ‘좋음’을 정답처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우리와 미술관을 어색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저자 이창용 도슨트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미술관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찾는다면 그걸로 좋은 것이라고. 이 단순명료한 메시지는 아마도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면서 우리와 미술 사이에 얇고 굳건한 다리를 놓아줄 테다.
초대장의 첫 번째 초청지는 프랑스다.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오르세, 오랑주리, 로댕 미술관과 그에 속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가장 친절하고 인간적인 도슨트의 설명을 곁에서 듣는 듯 생생하다. 실제 미술관을 옮겨 놓은 듯 텍스트로 재구성한 공간의 동선을 따라가면 생생한 묘사와 설명이 뒤따른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
위대한 걸작들을 뒤로하고 다루계단으로 향하다 보면, 뱃머리 위에 우뚝 서서 파도를 가로지르는 듯한 형상의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맞닥뜨립니다. 니케는 선수상으로 많이 애용되었는데요.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의 함선들이 파도를 가르며 항해를 하자, 승리의 여신 니케는 함선의 뱃머리로 내려와 승리의 나팔을 불며 그리스 함선을 이끕니다. 그리고 어느새 거친 파도는 뱃머리를 넘어 니케를 감싼 얇은 옷자락을 적셨고, 그 순간 젖은 옷자락 너머 니케의 아름다운 육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네요.
- p.22 - 24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지식)이 사실적인 묘사와 이미지(표현)를 만나 조화롭게 지면을 채운다. 도슨트의 윤리에 충실하게 작품을 해석한 후 사유를 덧붙이거나, 해석의 방향성을 새롭게 열기도 한다. 이토록 친절한 도슨트의 설명은 시선을 한 작품에 오래 머물게 하거나, 슬쩍 보고 지나쳤던 작품을 되돌아보려 책장을 거꾸로 넘기게 만들기도 한다. 텍스트로 예술 작품을 정교하게 재현해놓은 이 책은 예술 감상을 위한 가이드이자, 일련의 축소된 예술이다. 미술관을 찾아 파리에 갈 순 없어도, 프랑스에 가면 미술관을 가야겠다는 생각. 일단은 이러한 소소하고 막연한 마음이 좋은 미술 감상의 시작이라는 것을, 미술 수업이 끝난 뒤 십수 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