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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Jan 12. 2023

영화, 뛰어오르다

이옥섭, <메기>(2019)

우선 메기가 궁금해져 검색해본다. 포털 사이트에서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메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그 메기였고, 너무도 메기처럼 생긴 메기였다. (그러니까 미끈한 몸통에 넓적한 입과 수염이 달린.) 강이나 하천의 최상위 포식자라는 사실과 1m가 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정보는 새로웠다. 그러나 단지 몇 가지의 새로움―그마저도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무관심했던 상식의 환기―을 말해주기 위해 이 영화는 무려 제목까지 할애한 것일까. 일단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메기>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영화 전반을 주도하고 있는 분위기는 유쾌함처럼 보인다. 황당하고 허술한 공간적 배경 ‘마리아 사랑 병원’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뜀뛰기를 해서 출근카드를 찍어야 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그런 분위기를 굳힌다. 영화가 허구에 가까운 참신함을 내세우면서 가볍고 발랄한 정서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화가 품은 말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을 테다. 분명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노골적으로 그 속내를 드러낸다. 물론 그 키워드는 ‘믿음’이다.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젓게 되는 영화, 이옥섭의 <메기>를 본다.



여윤영,


어느 날,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엑스레이실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신체가 찍힌 (SE)X-ray 사진이 공개된 것. 병원 사람들은 “누가 이 사진의 주인공인지” 가려내는 일,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에 착수한다. 더 정확히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간호사 윤영(이주영) 또한 거의 확신이 된 의심(“우리 게 맞는 거 같애”) 앞에서 고민한다. “관두자.” 고민 끝에 내던진 윤영의 체념은 모호하다. 의심을 멈출 것인가, 혹은 생업을 그만 둘 것인가. 모호한 감정 상태로 사직서를 품고, 그녀는 일단 출근한다.


병원에 출근한 윤영에게 부원장 경진(문소리)이 찾아온다. 윤영을 사진의 주인공이라 의심하는 경진 앞에서 윤영의 반발심은 오히려 불타오른다. 사실의 문제가 믿음의 층위로 변했으므로, 윤영은 차라리 당당하게 의심에 맞서기로 한다. 이제 윤영에게는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휴직을 종용하는 경진의 권유를 무시하며, 윤영은 계속해서 병원에 다니기로 결심한다.


믿음의 차원에서 나―자신에 대한 믿음과 나―타자 사이의 믿음이 있다. 전자가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라면 후자는 사회적 생존의 고통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일차적 위협이자 본능적 회피 욕구로 와 닿는 것은 단연 후자일 것. 영화에서 스스로를 용의선상에 올린 병원 사람들은 타자로부터의 의심에서 도망치기 위해 무단결근을 선택한다. 나―자신 믿음의 몰락은 두고 볼 수 있으나, 나―타자 믿음의 붕괴는 견딜 수 없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나 때로는 (사회적)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의심받는 자의 저항이 나―타자 사이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는 작업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윤영과 경진만이 병원에 출근한 하루 동안 모든 의심은 믿음으로,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을 통해 재구축된다. “어떤 상황이 와도 일단 사람을 믿고 보는 거예요.” 믿음의 불가능성을 향해, 영화적 장치인 허구와 황당을 통해서 휙휙 던지는 영화의 말은 기어코 사랑스럽게 들린다. 윤영은 영화의 말을 온몸에 싣고, 의심스러운 용의자에서 믿음의 구원자로 차차 나아간다. (물론 남겨둔 ‘1% 의심’ 덕분에 모종의 사건이 해결되지만.)



이성원,


그렇다면 성원(구교환)은 어떠한가. 대책 없이 순수하고, 그런 순수함이 대책 없이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인물 성원은 윤영과 동거 중인 그녀의 연인이다. 성원은 윤영과 경진이 이끌어간 영화의 초반부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경제적으로 무기력하지만 윤영과는 속옷을 공유해 입을 정도로 친밀한 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눌하고도 친숙한 성원의 말투와 행동은 우리가 그를 의심하는 자도 아니며, 의심 받을 인물도 아닐 것이라 자연스레 믿도록 만든다.


성원은 대한민국 곳곳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싱크홀 덕분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싱크홀을 메우는 청년인력으로 파견된 성원은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영화에 웃음을 더하고(심각한 재난인 싱크홀마저 유쾌하게 묘사되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에 대한 관객의 신뢰를 굳힌다. 그러나 줄곧 웃음을 통해 믿음을 더해주던 성원의 캐릭터는 곧 첫 번째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윤영이 선물해준 반지를 잃어버린 후 찾지 못하던 성원은 자신의 것과 비슷한 반지를 발가락에 낀(발가락이라니!) 동료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성원의 마음에서 점차 자라난 의심은 확신에 찬 행동으로 이어지고, 함께 밥을 먹고 몸을 부대끼던 동료와 그의 사이는 한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의 성원이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자였다면, 두 번째 사건의 성원은 불길하게 의심받는 자가 된다. 성원의 전 여자친구가 윤영을 찾아와 성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했었다는 고백을 털어놓은 것. 그러나 앞서 영화가 이미 전했던 메시지(“일단 사람을 믿고 보는 거예요”)의 잔향은 여전하며, 우리와 성원 사이 쌓아왔던 영화적 신뢰감(캐릭터성)은 굳건하다. 오히려 윤영만이 그 불행한 여성의 고백에 불안감을 느낀다. 성원에 대한 윤영의 의심은 점차 망상처럼 변해간다. 불어난 의심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편집증적 태도로 성원을 내치는 윤영을, 믿음의 구원자로 나아가던 길에서 다시 고꾸라진 그녀를, 우리는 다시 의심하게 된다.


초라한 모습으로 윤영의 집에서 쫓겨난 성원은 이제 억울하게 실연을 당한 인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가 자신을 찾아온 윤영에게 진심을 담아 전달한 메시지는 그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임을 (아주 잠시 동안) 거의 확신하게 만든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다시 믿음의 관계로 나아가려는 윤영의 희망 어린 질문 뒤에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가히 공포스럽다. “어. 전 여친 때린 적 있어.” 윤영을 향해 장난으로 내밀던 주먹이 실제일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이 엄습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도, 영화도, 말을 잃고 만다.



메기.


일관되게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유쾌한 영화는 믿음의 패배라는 비극으로 끝난다. 영화는 윤영의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가능성을 부풀렸고, 성원의 사실적 이야기를 통해 완전한 믿음의 불가능성으로 다시 추락한다. 믿음은 허구에 가까우며 의심은 사실에 기초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처럼 단순하고 위악한 메시지는 힘이 세지만, 어쩐지 달갑지는 않다. 우리는 씁쓸한 의심 끝에 한걸음 더 나아가본다.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전반에 걸쳐 내레이션을 통해 등장하는 메기(천우희)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다. 메기는 윤영의 억울함도, 재해의 징조도, 성원의 터무니없는 의심도 알고 있다. 정확한 사실을 지각하고 있으나 현실에 개입할 수는 없는 존재. 오로지 작은 어항 속이 한계가 되는 메기의 존재 그 자체를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그녀의 이런 말. “사실이 존재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대요. 사실은 언제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고.”


우리는 정확한 사실이 믿음을 완성시키는 조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사실’이 존재하는 곳은 없다. 달리 말하면 애당초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이란 단지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사실을 잃고 믿음과 의심 사이를 종횡무진 횡단하는 와리가리적 세계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믿음과 의심을 양분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믿음에 대하여, 혹여 그것이 거짓이었다 해도, “다음 번엔 두 배로 잘해주”면 된다는 다짐. 혹은 누군가에 대한 의심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 얼른 빠져나오”면 된다는 각오. 대체로 이런 종류의 마음이 마구 흔들리는 세상을 가만가만 다독일 테다.


영화를 한 차례 다시 보면서 뒤늦게 이 영화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영화 프로젝트로 제작됐음을 발견한다. 물론 영화가 자본에 의한 구조적 폭력, 젠더 이슈 등의 문제를 두루 다루고 있기에 이 발견이 깜짝 놀랄 만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무관심하게 죽어가던 상식의 환기라는 차원에서 제목만큼이나 흥미롭다. 어떤 영화는 흔들리고 움푹 꺼져가는 좁은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힘껏 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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