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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Mar 16. 2023

그냥 기차여행일 뿐이야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

열차는 삶의 흔한 은유다. 열차는 대체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 정해진 선로 위를 달린다. 선로를 착실히 따른다면 출발부터 종착에 이르는 과정은 차창 밖 풍경마저 유사하다. 큰 줄기에서 생로(병)사를 거치는 우리의 삶 또한 대체로 비슷하므로, 열차는 인류가 인류의 삶을 본떠서 만들어낸 피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매일 동일한 길을 착실히 달리는 열차를 보고 있으면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선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얼굴들. 어떤 날엔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들.


그리고 그 정직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삶을 결코 열차의 은유로 대입할 수 없는 사람들. 곧게 뻗은 선로를 곧이곧대로 달리는 일을 절박한 공포로 느끼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방이 막힌 열차는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고, 그 열차가 강제로 통과할 경유지 역시 지옥처럼 보일 테다. 지옥으로 향하는 지옥열차를 견딜 수 없으므로, 그들은 열차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우리는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인 후 한발 늦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비극으로 끝난 한 시인의 생애 같은 것.


공연제작소 작작의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를 본다.



티케팅,

강요된 타율여행


어린 실비아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열차에 오른다. 떠나고 싶지 않다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실비아를 억지로 달래 자리에 앉힌 후 부모는 홀연히 사라진다. 어딘가 음산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열차에 혼자 남겨진 실비아는 불안해 보인다. 기적 소리가 흩어지고 열차가 출발한다. 어린 실비아의 여행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태롭게 시작된다.


그렇다면 실비아가 탄 열차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차표에 적힌 종착역은 ‘아홉 번째 왕국’이다. 그 왕국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쯤 도착할지 알 수 없다. 그곳의 먹거리와 문화와 사람은 어떠한지조차 모른다. 실비아는 목적지에 대해서 어떤 정보도 알지 못한 채로 떠나야 한다. 다만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기차여행이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지며, 그럼에도 중간에 하차할 수 없고, 반드시 그곳에 도착해야만 한다는 사실뿐이다.


실비아를 열차에 태운 것은 그녀의 부모다.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삶에 구체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이론이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성정을 타고난 이에겐 그 영향이 더욱 거대할 테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던 실비아는 자신의 시를 알아봐주는 그녀의 아버지를 사랑했고, 당대 여성의 전형적인 삶을 자신의 생에 끈질기게 주입해온 어머니를 미워했다. 이것은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변형처럼 보이는데,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로 변이되어버린 이 정서적 통증은 그녀의 삶 전체에 걸쳐 합병증을 일으키고 만다.


치밀한 계획 없이 훌쩍 떠나 즐기는 여행을 우리는 자유여행이라고 부르며 존중하지만, 실비아의 여행은 오히려 자유가 부재하는 여행이다. 부모가 발권한 차표 한 장을 강제로 손에 들고 오직 무지와 불안 속으로 떠나는 긴 여행. 과정이 행복하지 않고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행. 이처럼 타인에 의해 강제된 여행을 타율여행이라고 한다면, 분명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스스로 멈출 방법 또한 있을 것이라고 어린 실비아는 확신한다. “비상정차를 할 거예요.”



경유,

필사적으로 살인하기


성인이 되어 영국의 명문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실비아는 천재 시인이라고 불리는 테드를 만난다. 그들은 시를 통해 교감하고,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사랑하는 남편 테드와 영감을 나누며 꾸준히 자신의 시를 쓰는 실비아의 삶은 우선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열차는 달리고 있으므로, 그녀의 삶 앞에는 점차 많은 굴곡이 드러나게 될 테다. 열차가 속도를 올릴수록 그녀가 강제로 던져진 세상의 풍경은 점차 붉고 어둡게―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지옥의 흔한 배경색이며, 그녀가 육체의 안과 밖으로 흘렸을 피의 색깔이기도 하다― 변해 간다. 열차가 지나갈 다음 경유지는, 적어도 그녀에게는, 분명한 지옥이다.


문단의 인정을 받아 승승장구하는 남편 테드와 달리 시인으로서 실비아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정형화된 시가 매력을 잃듯, 정해진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던 실비아는 생명력을 잃어간다. 테드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시작되는 뮤지컬 넘버는 음산한 조명과 (실비아를 제외한) 인물들의 기괴한 몸짓을 통해 그녀의 지옥을 시청각으로 드러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하는 비운의 시인이자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게으른 여성. 위대한 시인과 멋진 아내, 좋은 엄마라는 역할의 분열 속에서 실비아는 지독하게 방황하고, 남편 테드는 바람을 피워 실비아를 떠난다. 사랑하는 것들을 잃은 좌절과 분노 속에서 실비아는 무너져간다.


실비아는 시를 통해 스스로가 통감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남류’ 언어가 축적된 사전의 의미를 ‘아름답게’ 드러내야 했다. 그 사전은 아버지가 선물해준 사전이기도 하며, 남편이 조언해준 사전이기도 하므로, 시가 곧 삶이었던 그녀의 세상을 지배하던 존재는 남성의 언어로 대변되는 남성적 권위 그 자체였던 것. 위대한 시인이자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그녀는 ‘여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던 시대 앞에서 수없이 좌절한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은밀한 억압에 굴종했으나, 사랑하는 그들이 끝끝내 그녀의 삶을 무너뜨렸으므로, 그녀는 살기 위해 그들을 죽여야 한다.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탈출하고자 “맹렬한 야수”로 거듭난 그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필사적으로 시를 쓴다. 죽을힘을 다하여, 반드시 죽이기 위한, 필살(必殺)의 시를.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야. 자기를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물론 그녀의 살인은 처참히 실패한다. ‘시는 아름다워야 하므로, 게재할 수 없음.’ 살인을 통해 구원을 바라는 한 여성을 향해 천국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종착,

에스더 구해내기


부권 살해에 실패했으므로, 지옥을 통과하는 지옥열차 안에서 그녀를 구할 방법은 아득해진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방법은, 어린 시절의 그녀가 이미 그러했듯, “비상정차”뿐이다. 시도, 사랑도, 모든 것이 좌절된 그녀는 세 번째 자살 시도를 준비한다. 그녀의 비상정차는 무(無)의 세계, 즉 진짜 죽음으로 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임박한 이 지옥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기차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것. 죽었다가 살아날 모든 계획을 짜고, 아이들을 위한 빵을 구워 놓은 뒤, 오븐에 머리를 넣으려는 그녀를 막는 것은 또 다른 주인공 빅토리아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빅토리아를 처음 만난 실비아는 그녀와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무언가에 억눌린 듯 주눅 들어 고민하는 실비아와 달리, 언제나 직설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빅토리아는 어쩐지 실비아 자신의 억압된 내면을 대변하는 그녀의 화신처럼 보인다. 실비아는 본인들의 시상 속에 자신을 가둬버린 아버지/남편의 굴레를 벗어나 거침없이 내면을 발산하는 빅토리아에게 마음을 터놓는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하는 실비아 앞에 다시 나타난 빅토리아는 그녀가 과거의 순간들을 이미 지나쳤던(그리고 자살에 성공해 죽음을 맞이했던) 그녀 자신임을 고백한다. 실비아의 자살 시도를 막기 위해 빅토리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이 마지막 신은 크게 놀랍지 않은 반전이지만, 그녀가 과거의 그녀 자신에게 전하는 위로의 노래는 놀랍도록 아름답다. 시간을 초월해 자기 자신이 되어 만난 그녀들은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고, 시간을 견뎌 지옥을 통과하면 곧 왕국에 도착하리란 믿음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실비아가 새롭게 쓰기 시작했던 소설 <벨 자>에서 유리종 안에 갇힌 여성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에스더는 사실상 실비아 자신처럼 보인다. 소설 속 에스더는 유리종을 빠져나오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고, 실비아는 그런 그녀를 다시 살릴지 혹은 영원히 죽일지 고민하며 결말을 쓰지 못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이미 죽은 빅토리아가 다시 쓴다. 그녀가 쓰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받은 그녀의 결말에서 그녀는 다시 살아난다. 요컨대 그녀가 그녀 자신을 구한 것. 자신을 구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다소 뻔한 교훈은, 삶의 지옥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결말이다. 매정한 역사의 기록 속에서 실비아의 생은 죽음으로 끝났으나, 더없이 아름다운 창작 속에서 실비아는 종착을 향해 살다, 혹은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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