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1984BOOKS,2021)
한참 미뤄둔 책을 뒤늦게 읽었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책들이 한동안 서점과 도서관 여기저기에 보였고,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학상의 권위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있으리란 믿음이었다. 그러한 기대감을 잠시 접어두고 조만간, 라는 말을 되뇌며 일단은 걸음을 옮겼다.
코끝이 오래도록 차가웠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추운 날들 사이 들꽃처럼 자주 피고 지던 특유의 게으름에 한없이 무너졌고, 제법 따스해진 공기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봄. 외투는 가벼워지고, 햇볕은 맑아지고, 선명한 꽃들이 당장이고 피어날 것 같던 날. 책장에 진열된 책들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나서야 미뤄뒀던 작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화사한 꽃이 아닌 나무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봄보다는 차라리 가을을 닮은 이야기.
아니 에르노의 소설 『남자의 자리』를 읽는다.
건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내내 빈틈이 없을 것 같았다. 작가가 써내려간 문장은 정확한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었고, 하나의 정확한 문장 뒤로 다시 확실한 사실의 문장을 이어갔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소설 속 문장들은 미학적, 혹은 예술적 감각들이 파고들 빈틈을 열어두지 않을 각오처럼 보인다. 기원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지만 장르적으로 ‘소설’이기도 하므로, 문학적 과장에 대한 철저한 결벽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어쩐지 허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가는 선수를 쳐 우리의 뻔한 우려를 보기 좋게 잠재운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20p)
지금 쓰는 것은 단지 소설의 형식을 빌려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놓은 결과물이라는 것. 적어도 현실의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며 살아갔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소설이지만 결코 소설이 될 수 없는(혹은 되어서는 안 될) 이야기이므로, 이것은 “불가능”한 소설이다. 이러한 문학적 불가능성을 고백하면서, 소설은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의 삶을 찬찬히 톺아보며 나아간다.
농촌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읽지도 쓰지도 못”(22쪽)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사람. 그녀의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전쟁 후에는 산업화가 시작된 도시에서 건실한 노동자로 살아갔다. 공장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다. 곧 작은 가게를 차려 장사를 시작했다. 평생 “먹고 사는 일”(35쪽)에 매달렸고, “다시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34쪽)이 두려워 근검절약하게 생활했다. “중심가에 테라스가 있는 아름다운 카페를 운영하는” 꿈도 있었지만, “새로 시작하는 일이 두렵기에 포기”(66쪽)했다. 그런 삶을 살다가 67세에 사망했다.
평생의 기억을 책 한 권으로 줄이고, 다시 그 내용을 한 문단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한 남자의 삶을 읽는다. 투박하고 덤덤하며, 진실하고 묵묵하다. 이러한 아버지의 삶을, 쓸 수 있는 방식으로만, 쓰기.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40쪽) 이 건조한 작업을 끝끝내 해낸다.
나는 책의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더위는 6월 초에 찾아왔다. 아침의 냄새로 날씨가 좋을 것을 확신했다. 곧 아무것도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것을 머뭇거리며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제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사건을 더하거나 각색하는 것도,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 것도 더는 가능하지 않다. (91p)
문학적 즐거움을 거세하며 고통스럽게 완성했을 이 작품은 “다가오고 있”는 “책의 결말”을 덤덤히 맞이한다. 다시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사건을 더하거나 각색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쓸 말이 없을” 때까지 오직 진실하게만 쓴다. 거대한 슬픔 없이 마지막 순간을 찬찬히 받아들이는,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나무 같은, 아버지의 삶처럼. 문학처럼 쓰지 않고 문학적 가치를 얻는 데 성공한 이 소설은 마침내 아름다워진다.
좋은 소설을 만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반드시 무언가 떠오른다고 믿는다. 투박하고 덤덤하고 진실하며 묵묵한 무언가가. 예컨대 1959년 여름, 바닷가와 논밭이 아름답게 뒤섞인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삶 같은 것. 풍요로운 유년기를 거쳐 가난했던 성장기를 지나 오늘까지도 먹고 사는 일에 분투하며 늙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 언젠가는 내가 직접 이 남자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미뤄둔다. 그 이야기는 조금 더 아름다울 수 있기를, 가을보다는 봄을 닮은 이야기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