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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Apr 21. 2023

잔인하다, 신도 인간도

이창동, <밀양>(2007)

신과 종교에 대한 논쟁은 길고 깊다.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에 대한 배척. 거의 극단을 오가며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주장들은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다. 큰 틀에서 신이 존재한다 / 신은 이롭다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은 해롭다의 네 가지 주장이 이합집산하며 뒤얽혀 싸우는 논쟁의 장은 앞으로도 쉽게 닫히지 않을 것. 여전히 신의 존재 유무를 규정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대체로 신의 유해성에 관한 충돌이 될 테다.


먼저, 신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준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이 이룩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불합리와 부조리의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안정할 수 있도록 돕는 초월적 신의 존재는 필요하다는 것. 인간이 인간이라는 한계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도울 때 신은 이롭다. 다음은 신이 인간에게 해롭다는 주장인데, 신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했을 때 인간은 더욱 처참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신은 철저한 믿음을 전제한 존재이므로, 신의 배신이 주는 상처는 인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얼마 전 보게 된 좋은 영화는 이 두 번째 주장을 옹호하는 듯 보인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을 본다.


신애(전도연)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준(선정엽)과 함께 밀양으로 향한다. 밀양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의 차가 고장 나고, 그녀는 카센터 사장인 종찬(송강호)을 만나게 된다. 여행이냐고 묻는 종찬에게 신애는 정착을 말한다. 사별한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살기 위해 가고 있다는 것. 죽은 남편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죽은 남편이 부재하는 곳으로 향하는 신애의 얼굴에 ‘밀양(密陽: 비밀의 햇볕)’이 비친다. 그러나 희망을 위해 찾은 밀양의 ‘밀양’은 가혹한 온도로 신애를 따라다니게 될 테다.


밀양에 집을 구하고 피아노 학원을 차린 신애는 새로운 삶을 위해 노력한다. 학원 홍보 전단지를 붙이고 개업 떡을 돌리며 주민들과 안면을 트려 노력하면서도, 신애는 혼자가 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경제력을 과장하며 서슴없이 거짓말을 한다. (“좋은 땅 혹시 아시면 소개 좀 해주세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시작된 신애의 거짓말은 타인의 섬뜩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신애의 경제력을 노린 어린이 학원의 원장 도섭(조영진)이 그녀의 아들 준을 납치한 후 살해한 것. 밀양은 남편이 부재하고 아들을 빼앗아간 차가운 도시로 변한다.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그 절망의 도시에서 신애가 의탁할 존재는 이제 신뿐이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두 번의 시련(남편, 그리고 아들의 죽음)이 신애를 덮쳤으므로 그녀에게는 초월적 위로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안 믿는”다는 그녀였으나, 그녀가 눈으로 목격한 것들이 너무 괴로웠기에 신애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찾게 된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한 번에 쏟는 것처럼 거친 울음을 토해낸 신애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위로 아래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적극 받아들이며 새 삶을 살기 시작한다.


신애는 종교적 몰입을 통해 일상의 안정을 차츰 되찾아간다. 그녀는 성경의 말씀을 삶의 태도로 이행하는데 온 힘을 쏟고, 그 과정에서 아들을 죽인 살인자 도섭마저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그녀는 신의 뜻을 위하여 살인자를 용서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려 (여전히 밥을 먹다가도 문득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자신의 삶을 용서하려고 하는 것.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그녀 자신을 완전히 놓아주기 위해 신애는 교도소에 수감된 도섭을 찾아간다. 이 위대하지만 위태로운 초월적 결심으로부터 이 영화는 인간적 고통으로 다시 충만해지기 시작한다.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고, 이 영화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이 두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므로, 용서란 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다. 문제는 아름다운 용서의 행위가 내가 아닌 다른 주체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데, 신이 이미 자신을 용서했다는 도섭의 고백은 실제로 신이 그의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신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를 성급하게 사랑해버린 일이다. 신애의 용서 이전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한 도섭, 그리고 그의 성급한 용서에 자신의 이름을 선뜻 빌려준 신의 행위는 명백한 월권이 되고 만다. 믿었던 신의 무책임한 배신은 신애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이로운 존재였던 신이 해악이 됐으므로, 신애는 자신의 삶을 걸고 신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유익함을 부정하는 것. 그녀는 거대한 상처를 준 신에게 복수를 실행한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계명 어기기. 그녀는 절도를 하고(‘도둑질하지 말라’), 교회 장로를 유혹하고(‘간음하지 말라’), 마침내 자살까지 시도한다(‘살인하지 말라’). 그녀는 신의 계명을 어기는 자신의 모습을 신에게 생생히 보여주며(“잘 보이냐구”) 용서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물론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절망감을 신에게 주기 위해서는 신이 그녀를 용서하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하므로, 손목을 그었던 신애는 다시 살아야만 한다.(“살려주세요.”)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하면서, 신애는 밀양에서 다시 살아간다.


<밀양>은 부조리한 세계의 고통과 신의 유해성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의 개입을 걷어내고 들여다본 그 중심에서는 결국 인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용서를 행하기 전에 죄악이 있다. 화해를 말하기 전에 고통이 있다. 죄가 없다면 신의 존재 유무는 중요치 않으며, 고난이 없다면 신의 이로움과 해로움은 의미가 없어진다. 무거운 죄악과 처절한 고통 사이에서 다만 인간은 있으므로, 이 세계에서 신에 대한 논쟁은 결국 인간이 만든 지옥에 대한 치열한 탈출 시도이다. 어쨌거나 고고한 신은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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