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어떤 공간에 평화와 고요가 있다. 깊은 밤과 어스름한 새벽의 정적을 닮은, 언제까지나 결코 깨지지 않을 것만 같은 침묵이 있다. 누군가 흡족하게 응시하는 저 고요 속에 그러나 “소리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은 있고, 그러한 아우성은 언제나 마지막에 이르러 소리를 내지르고 만다. 세계는 꽉 막힌 진공이 아니므로 결국, 소리는 흐르고 퍼져나간다.
외치지 못한 것을 외쳐주는 것이 이야기의 한 기능이기에 침묵을 강요받은 이들은 자주 이야기의 힘을 빌린다. “억압된 것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해방의 이야기, 특히 억눌렸던 여성들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이제 흔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다. 여전히 묵묵하고, 묵직한 이야기의 결에 음악과 춤을 입혀 강렬하게 말하기. 그런 방식으로 말해질 때 어떤 이야기는 더 거대한 아우성이 된다.
‘내지르는 아우성’이 된 이야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본다.
극의 배경은 1930년대 스페인 남부의 어느 마을이다. 익숙하고도 낯선 플라멩코 넘버와 함께 휘몰아치는 프롤로그에서 강조된 부분은 남편의 죽음과 남겨진 다섯 명의 딸들, 그리고 한 과부. 남편의 죽음 이후 온전한 여성들의 공간이 되어버린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은 베르나르다 알바다. 행실이 방탕하던 그녀의 남편 안토니오가 죽고 남성―가부장이 소멸된 집안은 남성성의 권위로부터 벗어났지만, 어쩐지 해방을 향해 열리지는 않는다. 안주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오히려 모계의 수직적 권위에 기반한 새로운 가장―가모장이 되어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걸어 잠근다.
남편의 상을 치르는 8년의 기간 동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철저히 닫힌 공간이 된다. 베르나르다는 딸들에게 절제, 특히 남성에 대한 금욕을 강요한다. 숨 막히는 통제를 통해 만들어낸 욕망 멸균의 공간 속에서 그녀는 “내 보호 안에서는 모두가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고 믿는다. 욕망의 입구를 막아 고요하지만, 그것의 출구 또한 없기에 환기가 되지 않는 집. 그렇게 욕망의 농도가 차츰 쌓여가는 어둡고 불쾌한 집. 안일한 안전감에 젖어든 베르나르다의 집 담벼락 너머로 딸들의 욕망의 대상―첫째 딸 앙구스티아스의 약혼자 뻬뻬―이 매일 밤 찾아오고, 그를 갈망하게 된 숨겨진 욕망들은 모습을 드러낸다. 고요한 집, 이제 각자의 방 안에서는 조용한 폭풍이 분다. 베르나르다의 집은 안으로부터 무너져간다.
흔히 그렇듯 통제는 합리적 명분의 가면을 쓴다. 남성의 본능적 행동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폭력의 시대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규칙과 규율뿐이라는 것.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사생아를 파묻은 사실로 뭇매를 맞던 여성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규칙도 범칙도 오직 여성에게만 속한 시대였으므로(남성은 규칙의 통제 대상조차 아니었으므로), 여성에게만 날카로운 돌을 던지는 그 시대로부터 딸들(혹은 집안)을 지켜내기 위해, 베르나르다는 굳게 잠그고 못까지 박은 문처럼 단단해져야했을 테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낸 통제 원리는, 비록 문명의 탈을 썼을지라도, ‘수컷들은 밖에 풀어놓고 암컷들은 마구간에 가둬야 한다’는 짐승의 원칙에 불과할 뿐이다.
매력적인 청년 뻬뻬를 향해 깊어진 자매들의 욕망은 비참한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 욕망은 통제를 통해 덩치를 키운 욕망이므로 통제를 통해서는 잠재울 수 없는 욕망이며, 오직 자유의 부여를 통해서만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는 욕망이다. 물론 딸들이 꿈꾸는 것은 권위로부터의 자유(Liberty)가 아니라 성애(Erotism)로서의 자유다. 오직 남성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유이기에 오늘날의 여성성이 추구하는 자유의 의미와는 분명한 거리가 있지만, 우리가 만약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면 자유도 사랑도 언제나 방향은 올바르다.
할머니와 엄마의 삶―우리는 그것을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을 이어가는 것이 딸의 운명이라는 극 중의 대사는 체념처럼 들린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낸 베르나르다의 노모 마리아 호세파는 오히려 자유롭게 망상한다. (신체적) 삶의 주기의 끝에 이르러 다시 (정신적) 아이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겠다는 그녀의 노래와 춤은 단단히 조여진 통제의 울타리 안에서 홀로 자유롭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딸이기도 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생, 그 순환의 과정 끝에서 그녀 또한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창녀로 사는 것보다 처녀로 죽는 것이 낫다고 믿는, 딸의 비극적 죽음 앞에 약간의 비통함만을 흘린 채 다시 “침묵”하는 단단한 그녀의 삶도 언젠가는.
뮤지컬의 제목 <베르나르다 알바>는 한 명의 인물이 아닌 공간이자 시간, 시대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런 척박한 시대의 절벽에서도 자유와 사랑에 대한 욕망은 들꽃처럼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