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보존과학자>
‘과학’이라는 단어에서 자주 멈칫했다. 내버려두면 적당하게 굴러올 바퀴에 작용하는 힘을 구하라는 문제들, 뉴턴이니 옴이니 한 끗의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법칙들 따위가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만연한 과학의 결과물들을 보면서―스마트폰, 인공지능, 우주로 쏘아올린 로켓과 같은―과학은 그저 나아가는 학문이라는 편견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과학은 쓸모를 중시하고, 도태를 승인하고, 멸종을 수긍하는 학문이라는 생각. 어떤 죽음에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학문이라는 생각. 과학과 이성의 시대, 그 세련되고 우아한 칼날 앞에서 스러져간 것들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과학에 대한 은밀한 반감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다르지 않았다.
‘보존’이라는 단어에서는 약간의 안정감을 느꼈다. 가치 있는 것을 지켜내는 일이자, 지켜냄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 건강을 회복한 산과 강, 폐허에서 복원된 문화재 같은 보존의 결과물은 언제나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부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자비,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려는 동정, 현재의 쓸모로 재단하지 않고 예전의 쓸모마저 기억해주는 정겨움이 보존의 진짜 의미라고 믿었다. 내게 보존이란 기꺼이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보존과 과학의 방향성이 어떤 선을 함께 그린다면, 그러니까 기꺼이 돌아가기 위해(보존) 앞으로 나아간다면(과학), 그 행위의 끝이 멈춰선 자리는 어디일까.
국립극단의 창작극 <보존과학자>를 본다.
많은 것이 사라져버린 먼 미래, 멸망에 가까운 세계에서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인 보존과학자1은 옛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수많은 물건이 쌓여있는 수장고에서 보존할 어떤 것을 선택하는 기준은 ‘가치’의 유무이다. 그녀가 이번에 꺼내온 것은 텔레비전. 그녀는 그 낡은 텔레비전이 천 년 전 과거에 살았던 저명한 예술가가 남긴 가치 있는 작품임을 굳게 믿는다. 과거의 예술작품이 현재에 다시 생생하게 재연되기를 기대하는 그녀는 오래된 텔레비전에 순수한 욕망을 투영하기 시작한다.
인력은 희귀하고 자원은 부족한 미래에서 모든 선택은 제한적이다. <보존과학자>는 먼저 삭막한 배경을 그려낸 후, 무언가의 가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길 것인가. 혹은 어떤 것을 되살려야 할 것인가. 예컨대 예술의 가치에 대한 질문. 예술의 객관적 규정과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연한 주관적 판단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어떤 작품이 세월이 지나가며 빛을 잃었다면, 그 작품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수많은 이의 손길을 거쳤다면, 창작자는 창작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연극은 보존과학자1의 다짐을 통해 답을 내놓는다. 가치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이 오래된 텔레비전은 여전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거라고. 주관적이고 모호한 답변을 밀고나가며 그녀는 복원 작업에 몰두한다.
텔레비전 복원의 과정에서 보존과학자1은 작품의 물성 속에 숨겨진(혹은 숨겼다고 믿는)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기에 이른다. 텔레비전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싶었던 작가(혹은 인류 보편)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끝끝내 텔레비전을 복원한다면 그 속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작가를 직접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것. 오직 효율적 과학만이 생존의 길이 된 디스토피아에서 지극히 예술적이며 다분히 비과학적인 해석을 통해 복원 작업은 추진력을 얻고, 보존과학자1은 끝끝내 텔레비전 복원에 성공한다.
극은 천 년의 사이를 두고 현재와 미래를 오간다. 낯선 미래의 시간에서 친숙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한 가정의 아버지와 세 딸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새어나오는 익숙하고 은은한 불빛이 흔한 가정의 모습을 비추고, 연극은 보다 관객의 피부에 가까운 이야기를 속삭인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현실과 자신을 단절한 채 텔레비전 시청에만 몰두하는 늙은 아버지, 각자의 꿈과 척박한 현실이 강제로 분리된 경계선 위의 세 딸. 각자의 슬픔이 모이는 무대의 정중앙에 굳건한 문―거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지만 동시에 좀처럼 열 수도 없는―이 서있다.
문은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경계이자, 외부에서 다시 내부로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의 은유이기도 하다. 첫째는 바깥에서의 실패 후 안으로의 도피를 원하지만 잠겨버린 문을 쉽게 열지 못하고, 둘째는 스스로가 너무 높게 그어놓은 성공의 문턱 앞에서 점점 뒷걸음질 치며, 셋째는 자신의 문을 만들 기회조차 없다고 믿으며 차라리 문을 부수고 다닌다. <보존과학자> 속 단단한, 그래서 더 가혹한 문은 날카로운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보호막이 아니라 안도 바깥도 넘나들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인다.
그 문을 통과해 “우주로 가는 기차”에 오른 것은 늙고 무력한 아버지뿐이다. 리모컨 하나로 간단히 조종할 수 있는 텔레비전의 세상에 살면서, 각자 손 안에서 우주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가장의 허무맹랑함은 한없이 무력하지만 동시에 순수하다. 오직 그 순수함으로, 먼저 간 아내와 평온한 안식을 찾아서,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일탈은 단단한 문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는 아주 평범한, 바로 그 오래된 텔레비전이 되어 천 년 후 보존과학자의 수장고에서 건져진다.
텔레비전 속으로 떠난 아버지의 자취를 쫓던 세 자매는 아버지를 따라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기에 실패한다.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려는 우스꽝스러운 시도들이 모두 좌절되고, 결국 눈앞에 놓인 마지막 문 역시 통과하지 못한 자매들은 그 문이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를 향해 열려서 내가 드나들 수 있는 문, 통과한다면 보존될 자격을 얻을지도 모르는 문, 그 절실한 문을 만나기 위해서, 마지막 결심처럼 미뤄둔 큰 도전을 결행하는 둘째를 중심으로 자매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흩어진다.
한편 자신이 복원한 텔레비전이 위대한 예술작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보존과학자1은 크게 실망한다. 실망하는 그녀에게 텔레비전은 아주 평범한 자신에게도 어떠한 의미가, 단지 손을 맞대 온기를 전하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모든 가치는 스스로 부여한 의미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 절대적인 예술이 없듯이 무조건적인 가치도 없다는 것. 이 온기는 보존과학자1이 텔레비전을 복원 작업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기도 하다. 보존이란 부여된 의미의 해석이자 의미의 새로운 부여임을, 결국은 의미의 자의적 선택 그 자체임을 깨닫고, 보존과학자1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남겨진 세 딸의 이야기. 아버지의 세계―텔레비전이 새로운 가치를 얻길 기원하며 예술품의 자리에 올려둔 도전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킨다. 과학―나아가는 힘과 보존―되돌아가는 힘은 한데 모여 교집합하고, 불확실한 현재와 황폐한 미래는 환상적으로 만나며 소통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환상적인 여행과 별개로 그들 앞에 놓인 문은 여전히 굳건하다. 아버지의 일을 끝마친 후, 이제는 자신의 삶을 위해 떠난 세 딸의 이야기는 연극이 끝난 후의 삶에서 계속될 테다. 가까스로 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스스로를 꼬옥 안아주면서. 가치를 되살려내는 기술은 과학의 일이고, 먼저 그 가치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막막한 우리의 오늘 속에서, 과학은 보존과 그렇게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