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다음날 아침, 도훈은 다급하게 유진을 찾았다. 그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유진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며 전화를 걸었다.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유진에게 전화를 건 도훈은, 답답한 마음에 화면을 연신 내려다봤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마자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유진씨, 유진씨 찾았어요.”
"여, 여보세요?"
"유진씨, 지금 어디에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무슨 일이에요? 새벽부터 이렇게 급하게?”
“지금 당장 보여줄 게 있어요. 어딘지 말해줘요.”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나왔는데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알았어요.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요."
유진의 집에 도착한 도훈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목소리엔 여전히 떨림이 가득했다.
“찾았어요. 내가… 홍선숙하고 홍선우 남매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았다구요.”
"저, 정말이요?"
"네, 이것 보세요. 홍진수의 자 홍선우, 22년 전 홍진수에게 입양된 홍선숙, 이모님 말씀이 맞았어요. 어머니에겐 남자형제가 없었지만 유진씨에게 외삼촌이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진은 말문이 막힌 듯 반응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고, 고마워요."
"어머님이 어릴 때 가출을 했으니 혹시나 보육원이나 입양가정에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하다가..."
도훈은 전화를 끊자마자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다시 확인했다. 그 자료는 홍선숙과 홍선우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오래된 기록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는 차분하려 애썼다.
"이제 어머니와 외삼촌을 찾으러 가요."
도훈과 유진은 외삼촌이 있다는 전라도로 향하며 긴 여정을 시작했다.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겨울 풍경이 그들의 목적지만큼이나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기운을 풍겼다.
차창에 이마를 기대어 생각에 잠긴 유진을 보며 도훈이 물었다.
"유진씨 어머니 이야기 좀 해 줘요. 어릴때 유진씨는 어떤 모습이었어요? 어머니와 어떤 추억이 있나요?"
유진은 도훈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기억나는 게 진짜 많아요. 내가 진짜 꼬맹이였는데도 이상하게 다 기억이 나요.”
도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기억에 남는데요? 한 번 얘기해 봐요.”
유진은 눈을 반짝이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요리를 진짜 못했거든요. 가끔 김치찌개 끓이려다가 짜서 다들 물 마시느라 정신없었어요. 그런데도 웃으면서 ‘짜면 물 말아먹으면 된다’고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럼 유진씨가 요리 잘하는 건 어머니랑 다르네요?”
"아마, 엄마가 요리를 못하니 내가 맛있게 해서 드리려고 배우지 않았을까요?"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엄마가 설거지할 때 옆에서 숟가락 닦아주고, ‘다 컸다, 다 컸어’ 하면서 웃으시던 모습도 떠올라요.”
유진의 목소리에는 따스함과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금 더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한 번은 내가 다쳐서 울고 있었는데, 엄마가 내 무릎을 문질러주면서 ‘엄마가 주문 걸었으니까 금방 나을 거야’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손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도훈은 유진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가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우와, 유진씨, 기억력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어릴 때 일인데도 다 기억하다니.”
도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유진씨 이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표정이 너무 귀여운 거 알아요?”
유진은 도훈의 말에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뭐야, 지금 놀리는 거에요? 진지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뇨, 아뇨. 나도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에요. 정말로 예뻐서 그래요.”
유진은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더니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가 그리워요. 그런 엄마였는데... 그런 엄마가 사고뭉치였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도훈은 잠시 유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가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추억들을 이렇게 소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뭘 숨겼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장담해요. 어머가 자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유진씨가 태어나면서부터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되셨을 거에요. 그러니 유진씨 기억 속에 이렇게 예쁜 기억들로 가득하죠?"
유진은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둘은 그렇게 많은 말들을 주고받으며 가는 길의 긴장감을 잠시나마 잊었다. 서로의 대화 속에서 유진의 아련한 추억과 도훈의 따뜻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두 사람 사이의 케미가 더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