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ELAND] 궤도이탈 (EP.15)

북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던 길, 나는 잠시 원래의 길을 벗어났다

by 대숲사진가
서부로 넘어가던 날은 유난히 하루가 길었다
DSCF1452_1-683.JPG 아큐레이리 호스텔 방에서 바라본 전경. 밤새 또 많은 눈이 내렸다.


2022년 12월 26일 새벽, 아큐레이리 호스텔


전날 미바튼 호수에서 여행 중 최악의 위험을 겪고, 지칠 대로 지쳐서 쓰러져 잤지만 (오로라를 보러 나가볼까라는 생각조차도 못한 채 산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었다) 이른 새벽의 알람소리를 듣고 곧바로 번쩍 눈을 떴다. 북부에서 서부까지 건너가야 하는 기나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북부에서 서부까지는 450km가 훨씬 넘는 먼 길이었다. 오늘도 긴 하루임과 동시에 불확실함 속에 나 자신을 던져야 할 것이었지만, 조금은 나쁜 의미로 굵직한 기억을 많이 안겨준 북부와 작별하는 것에 아쉬운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여행이 또 한 번의 거점을 지나는 이 시점, 본격 아쉬움의 감정은 내려두고 이제는 서부로 떠나야 하는 길에 좀 더 집중해야 했다.


아직 잠에 반쯤 취해 있는 상태로 공용 부엌에서 빵 몇 조각과 소시지를 챙겨 먹고, 짐을 모두 실은 캐리어를 다시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와 호스텔 현관문을 열었다. 차디찬 공기가 내 얼굴을 때림과 동시에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밤새 '또다시' 내린 눈을 그대로 맞은 채 하나의 거대한 눈덩이처럼 보이던 내 차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길가에 나란히 주차된 차들이 모두 똑같이 그렇게 눈에 덮인 채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 차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북부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날 고생 시키는구나!"라고 내가 혼잣말로 투털거리며 차 문을 힘겹게 열어 시동을 걸고, 문틈이 얼어서 쩌저적 소리가 울리며 열린 트렁크에 짐을 던져 넣은 후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시동을 걸은 차가 이내 따뜻한 열을 올리며 앞뒤 유리창의 눈까지 모두 녹여내자, 비로소 출발 준비를 마쳤다. 땀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패딩까지 잠시 벗은 채로 차의 모든 눈을 치우던 나는 그제야 운전석에 앉아 도로 상황과 서부까지 넘어가는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을 할 수 있었다. 북부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그럴 기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따스하고 좋은 기억들만 들고 떠나자고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하며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아쉬움이 컸던 만큼 필시 다른 어느 날의 또 다른 여행과 바렘의 씨앗이 되리라는 마음을 실어 보냈다. 이제 목적지는 아이슬란드의 서부, 스네이펠스네스 반도였다.


IMG_5746.HEIC 전편에 잠시 소개했던 이 날 아침에 눈을 맞았던 내 차. 눈을 다 치우기 전까진 출발도 없다.




2022년 12월 26일 새벽, 아큐레이리, 서부 방면 도로 진입


겨울철 아이슬란드에서의 가장 첫 번째 원칙은 누가 뭐래도 '웬만해서는 1번 국도에 계속 머무르는 게 안전하다'일 것이다. 아큐레이리의 서쪽으로 차를 몰아 빠져나가면 곧바로 다시 그 1번 국도에 진입하게 되고, 이 길을 다시 따라가다 보면 서북쪽의 블란뒤오스라는 중간 거점 도시를 잠깐 거쳐서 웨스트 피요르드로 빠질 수 있는 분기점과 한번 만나고, 이를 지나쳐 그대로 쭉 서쪽으로 내려가면 스네이펠스네스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앞서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 상황과 날씨가 생각보다 오늘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저녁 머물렀던 호스텔 숙소에서 받았던 관광지도에는 분명히 'Arctic Coast'라는 길이 명시가 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이슬란드 북부 피요르드 끝자락들을 그대로 훑으며 극지방 방면이 그대로 보이는 해안선 도로들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나는 이 날 새벽 짐을 싸던 순간부터 그 길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는데, 1번 국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이 해안선 도로로 빠지는 분기점이 나올 것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까지도 하고 있던 경로 선택의 고민에 대해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스크린샷 2024-12-22 오전 10.43.48.png
스크린샷 2024-12-22 오전 10.44.37.png
그러니까 왼쪽과 같은 경로로 가야 했지만, 오른쪽의 경로를 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야큐레이리를 빠져나온 지 십여분이 경과한 순간까지도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Arctic Coast에 올라타기로 결심했다. 그 순간 직전까지는 고민이 길었지만 결정만큼은 명료하게 내렸던 기억이 나는데, 북부에서 마땅히 눈에 담은 것이 많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어차피 이 날 하루는 서부까지 이동하는 데에만 모든 하루를 다 쓸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왕 똑같은 이동일이라면 이 경로가 좀 더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북부의 자연이 나를 짓누르는 그 압도적인 힘은 여전히 나를 두렵게 했고, 이 경로에서 행여나 조난을 당한다면 정말 어렵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새로운 페이지로 다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머리를 비운 채 다시 새 결정을 내리는 내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궤도이탈'을 선언하며 1번 국도에서 벗어나 82번 국도로 차를 몰아 분기점을 통과한다. 같은 목적지였지만, 다른 길로 이어지는 새로운 과정을 잡아서 다른 궤도로 올라탄다. 그렇게 나는 1번 국도에게 '좀 나중에 보자고'라는 짧은 인사를 건네며 궤도를 이탈했다. 극지방 해안선길로 서서히 접어들어 갔다.



2022년 12월 26일 새벽, Arctic Coast Road, 달비크 초입


극지방 해안선을 따라 접어들면, 가장 첫 번째로 만나는 도시는 달비크라는 곳이었다. 이 여행을 정리하던 과정에 찾아보다 알게 된 것은 이 도시 이름의 달(Dal)은 골짜기라는 뜻이었고, 비크(vík)는 강을 의미했다. 즉 '골짜기가 들어오는 강'이 이 도시의 이름이었다. 82번 국도에서 어느 순간 짧은 터널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탁 트인 배경에 펼쳐진 마을과 아직은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뒤편의 웅장한 피요르드 지형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달비크라는 도시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또 있었다. 이곳이 바로 아이슬란드의 최북단이자 북극권에 속하는 그림지(Grímsey)섬으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관문도시였던 것이다. 극지방, 남미, 아프리카 대륙과 같이 내게는 가기도 어려울뿐더러 가볼 결심을 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존재들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나의 마음속에 큰 파장을 주곤 한다. 극지방이 저 방면에 있다니 뭔가 얼떨떨하고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차를 세우고, 달비크가 보이는 풍경을 잠시 새벽 공기를 한껏 마시며 바라본다. 문득 어둠 속에 둘러쌓여 있는 뒤편의 피요르드가 더 웅장해 보이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 새벽을 지나고 있는 시간대에 도시에는 불빛만 밝혀져 있었고, 다니는 차도, 사람도 하나 없었다. 마음만큼은 이곳의 많은 숨겨진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고 그림지 섬으로 떠나는 배에도 훌쩍 올라타고 싶었지만, 이 역시 겨울철에 운항을 할리도 만무했고 도시의 겨울잠도 깊고 깊었다. 아쉽지만 서행을 하며 도시를 찬찬히 훑으며 지나쳐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직 어둑한 길을 달리는 나를 샛별이 지켜보고 있었다.
DSCF1487_1-708.JPG
DSCF1493_1-711.JPG
새벽의 시글리피외르뒤르가 갖는 이 아름다움. 새벽별 만큼이나 아름답게 빛났다.
DSCF1488_1-709.JPG
DSCF1491_1-710.JPG


달비크를 지나친 이후 뒤이어 곧바로 만난 도시는 올라프스피외르뒤르(Ólafsfjörður)와 시글리피외르뒤르(Siglufjörður)였다. 마찬가지로 북부의 거대한 피요르드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펜스가 도시 전체를 품어주고 있는 듯한 전형적인 피요르드를 끼고 형성된 작은 항구도시들이었다. 빠르게 지나쳐가야 했기 때문에 올라프스피외르뒤르에서는 차마 차를 세우지 못했지만, 북부의 피요르드들을 지나쳐가는 길의 가장 마지막 마을이었던 시글리피외르뒤르에서는 잠깐이라도 짧은 산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에게는 커피 브레이크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차를 세웠다.


부둣가에는 거의 복숭아뼈 깊이까지 올 정도의 많은 눈이 쌓여있었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도화지 같은 눈이었다. 그 눈들을 내가 가장 먼저 밟으며 말없이 부둣가의 풍경과,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감도를 올리고 조리개를 모조리 개방해서 찍는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가 막히게도 이 부둣가를 산책할 쯤부터 동이 트기 시작했고, 바다도 요동치지 않은 채 잔잔한 리듬으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높은 곳으로부터 굽어보고 있던 피요르드가 더 높은 새벽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함께 반짝였다.


시글리피외르뒤르 부둣가를 산책할 쯤에 한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건 바로 북부를 지날 쯤부터는 내가 정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가 과연 정상일까 비정상일지도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추상적인 앞문장을 다시 덧붙여 설명하자면 분명 신비로움과 기묘하다는 감정을 느끼며 여행 중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잘 받아들이던 중이었지만, 누군가 갑자기 옆에서 나타나 조금만 톡 하고 건드린다면, 곧바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 비누방을 같은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 취약함의 상태이지만 동시에 그 상태가 선사한 내게 들려오는 정적과 바람 소리, 바닷소리로부터의 평온함을 느끼며 동틀 녘의 부둣가의 기록을 담았다.


DSCF1494_1-712.JPG
DSCF1495_1-713.JPG
DSCF1496_1-714.JPG
DSCF1497_1-715.JPG
DSCF1504_1-718.JPG
DSCF1499_1-716.JPG
DSCF1505_1-719.JPG
DSCF1503_1-717.JPG


아큐레이리를 출발한 이후로 3개의 마을을 지났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극지방 해안선과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시글리피외르뒤르의 눈으로 뒤덮인 마을 어귀를 벗어나고 등 뒤로 마을의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제설하느라 분주한 사람들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인데도 사람을 봤다는 사실에 꽤나 반가웠다.) 뒤편으로 육안으로 대강 봐도 매우 좁아 보이는 터널이 하나 보였다. 터널 입구 쪽으로 접근하면서 잠시 차를 내려서 제설하던 인원에게 "안녕하세요, 터널 지금 진입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터널에 진입하려고 다가가니 말로만 듣던 북유럽 외딴곳에서나 볼 수 있다는 1차선 터널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터널을 통과하던 중간에 다른 차를 마주하게 된다면, 중간중간 옆에 있는 갓길로 잠시 물러서거나, 둘 중 한 대는 차를 뒤로 후진하여 비켜서야만 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나와 맞은편 방면에서 다른 차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순간 와락 들었지만 너무나도 의미 없는 기우일만큼 이 시각, 이 계절의 이 터널을 지나는 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터널의 반대편으로 잔뜩 긴장을 한 채 통과를 한다.


이곳에서 터널을 2-3번 정도를 앞서 지났었지만 아이슬란드의 터널은 통과하고 있는 도중인 사람에게 주는 신비한 기대감이 있다. 마치 이 터널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인 것 같은 기분. 그 포탈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 내 눈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지, 그리고 '이 계절을 지나고 있을 그 세상'은 또 어떤 험한 위험도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과 조금의 걱정이 곁들여져서 머릿속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느덧 또 한 번, 터널의 반대쪽 끝이 다가온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다시 한번 사나운 겨울 바다. 길 위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DSCF1512_1-722.JPG
DSCF1515_1-724.JPG
DSCF1519_1-726.JPG
DSCF1521_1-727.JPG
사나운 겨울바다. 있는 그대로를 보았다.


터널을 벗어난 나의 눈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다시 한번 뿌옇게 된 동틀 녘 즈음의 하늘이었다. 그리고 바닷가가 한쪽으로 보이는 해안절벽 도로였다. 그 도로 위로 또 한 번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좀 평온하게 가나 했더니 또 시작이네!'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잠시 차를 천천히 서행하며 몰았다. 그럼에도 시야의 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지도상에 Trollaskagi라는 이름으로 표시된 등대가 바다와 함께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사히 극지방 해안선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의 겨울바다를 으레 봐왔듯 성난 기세로 그 파도가 제법 강한 힘으로 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등대와 어우러진 풍경과, 저 안개 낀 세상 넘어가 극지방이라는 사실이 이곳이 주는 신비로움을 더했다. 아마 날씨가 좋고 밝았다면 이 해안절벽을 좀 더 유쾌하게 지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게 모든 여행이 또 그런 최적의 조건에서만 길을 지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 겨울바다를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찍겠다는 마음으로 잠시 삼각대를 꺼내 겨울 파도의 움직임을 담아보았다. 애당초 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저속셔터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을 그곳에서 멈췄다가 다시 전진한다.


DSCF1536_1-731.JPG
DSCF1542_1-733.JPG
조금만 더 청명해지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해가 떴다는 사실이 저 너머 산등성이로부터 새어 나오는 빛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그 빛에 마치 소프트박스라도 씌운 듯, 계속해서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가 계속해서 쌓여 있던 눈들을 흩날려 나의 시야를 방해했다. 이때쯤부터는 낯선 이 길에 그새 또 적응을 했기 때문에 '아 정말 조금만 시야가 깔끔하게 보인다면 정말 예쁘게 풍경 즐기고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건 사진 하는 사람들의 무한 욕구이다. 가시거리가 멀리 보이고 깔끔한 시야는 바다이던, 하늘을 보는 일이건 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던 중에, 정말 거짓말 같이 바람이 멈추고 구름도 일순간에 개이기 시작했다. 동부 이후부터는 도로 위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계속했기에 이제는 혼잣말도 자주 하고 있었던 나는 "아니, 정말로 하늘이 열렸잖아?"라고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비로소 극지방 바닷가만이 보일 수 있는 붉은빛이 혼합되어 감도는, 깊고 차분한 푸른빛 하늘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침내 겨울철 Arctic Coast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순간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그 순간은 아마도 북부에서 보낸 시간 가장 끝자락에서 발견한, 북부 최고의 하이라이트였을 것이다. 극야의 계절에는 해가 아무리 이른 시간에 떠 있어도 우리가 석양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붉은 노을이 지는데, 그 노을이 가장 정면으로 비추는 곳, 사선으로 빛이 들어오며 푸른빛과 뒤섞이는 하늘, 그리고 산등성이가 만드는 그림자 속에 드는 빛깔까지, 모든 각도와 시선의 방향에 따라 보이는 빛깔이 모두 달랐다. 같은 시간의 같은 공간인데 이렇게 모든 장면이 다를 수가 있을까? 이 장면에서 찍었던 사진들은 매 순간순간마다 '어차피 늦을 거 여기서 시간 좀 쓰면서 가자'라는 마음으로 찬찬히 뜯어보며 찍었고, 나중에 여행 이후에 보정을 하면서도 분명 같은 조건으로 작업을 하는데 어찌 원본과 보정 작업물이 이렇게 다 천차만별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DSCF1548_1-735.JPG
DSCF1560_1-740.JPG
DSCF1574_1-747.JPG
DSCF1577_1-749.JPG
기어이 마지막의 반전을 내게 선사한 이 길


그 시선을 반대로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니 지평선 위에는 시린 빛깔의 뭉게구름이 걸려있고, 노을의 붉은빛은 그 구름이 만든 푸른빛 음영과 섞여 묘한 핑크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또 다른 신비로움에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간에 나무 벤치가 있는 일종의 공터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밥을 먹고 가자며 차를 세웠다. 이런 풍경을 보며 라면물 붓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꽤나 낭만의 극을 달리는 장면이라고 자부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북부에 와서 가장 큰 해방감을 느낌과 동시에 내 카메라와 차가 가장 바쁜 순간이었다. 나의 북부는 끝에서 일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선물해주고 있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이 반전에 나는 정신없어할 1분도 아깝다는 생각에 최대한 그 시공간을 최선을 다해 즐겼다. 진부하고도 의미 없는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날씨와 하늘 그대로 여행의 마지막까지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지평선의 끝까지 더 먼 곳까지도 이제는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평선 끝자락이 닿아 있는 곳까지의 넘실거리는 파도까지도 그 일렁거림을 볼 수 있었다. 적당한 화각도, 먼 곳까지 잡아당겨 기록하는 망원렌즈도 그 순간을 완벽하게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직감하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세밀하게 담아보겠다는 발버둥 침에 가까운 마음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노출과 초점만 맞으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DSCF1581_1-752.JPG
DSCF1583_1-753.JPG
DSCF1584_1-754.JPG
DSCF1588_1-755.JPG
DSCF1595_1-758.JPG
이 바다의 놀라움을 설명할 길이 있는가? 심지어 불과 직전까지 눈보라가 치던 날씨로부터 나타난 이 장면을 말이다


나는 가수 김장훈 씨의 노래를 좋아했는데, 이 사람은 공연에서 중간중간 꽤나 구구절절하고 세세한 토크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 사람이 본인의 노래 중 <소나기>라는 곡을 설명했던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노래가 희망적인데, 많이 아픈 노래예요. 제 삶도 그랬습니다. 벼랑 끝에 사는 느낌이었는데 노래라는 희망의 끈은 제가 놓지 않고 살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 곡을 제가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 여행에서 이 부분의 서사도,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늘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북부에 진입하던 순간부터는 정신없고,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옴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내 마음과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의 이 부분에서는 많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끝내 내 링로드의 가장 윗부분에서, 가장 춥고 어둡던 이 부분에서도 놓지 않았던 희망이 어쩌면 이런 반전의 순간에 닿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시점의 사진들을 다시 돌아보는 지금에도 내게 많은 용기를 주는 기록들로 남았다. 아마 이때의 아이슬란드에 버금갈 정도로 큰 위기들은 링로드가 아닌 인생의 길에서도 언제든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그때가 올 때마다 늘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낼 것이다.


DSCF1642_1-773.JPG
DSCF1645_1-775.JPG
그렇게 즐겁게 긴 길을 차근차근 달려나갈 쯤, 어느 순간 길이 또 한번 바뀜을 느꼈다.


2022년 12월 26일 오후, 다시 1번 국도 (서부 스네이펠스네스 반도 방향)


Arctic Coast가 선사하는 짜릿함에 사로잡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어느 순간 서부 방향을 가리키던 이정표가 있던 분기점을 지났고, 점점 해안선이 나의 등 뒤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해안선 도로를 벗어나 다시 1번 국도에 돌아온 것이었다. 중간에 지날 예정이었던 블란디오스라는 중간 거점 도시는 언제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이미 지도상의 내 뒤편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몽환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문득 달리고 있던 길 위를 둘러싼 풍경이 또 한 번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내가 이렇게 금방 서부까지 도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시 차를 정차하고 지도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서부까지는 절반 조금 넘게 왔을 뿐이었다. 다만, 지형이 다시 험준한 내륙을 가로지르는 길이 나오고 그러다가 다시 너른 평야와 피요르드 지형이 품고 있는 바다의 일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분명이 나는 바다를 오른편에 끼고, 1번 국도를 타고 서부로 들어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기나긴 이동 시간 때문에 서부까지 한참 남았음에도 짧은 낮과 오후가 이미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이 날 하루 잠시 동안의 궤도이탈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고 오히려 1번 국도에 계속 존재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놀라운 시간이었음에 나중에 북부를 추억하게 될 나의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더 넉넉하고 여유로워졌음을 느끼며, 여전히 한참 남은 목적지 스네이펠스네스 반도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완벽하게 벗어난 북부에게 더 이상의 회한도, 앞으로 서부까지의 남은 길에 대한 걱정도 없이 평온했다. 북부와의 후련한 안녕, 그리고 링로드의 마지막 서부에서 만나게 될 순간들에게는 '곧 만나'를 미리 보냈다.




다시 1번 국도에 올라 서부로 가던 길. 해안선 길과는 다르게 험준하고 장엄한 테마였다.
DSCF1680_1-792.JPG
DSCF1683_1-794.JPG
DSCF1684_1-795.JPG
DSCF1685_1-796.JPG


DSCF1690_1-800.JPG
DSCF1694_1-802.JPG
DSCF1692_1-801.JPG
DSCF1707_1-808.JPG
DSCF1713_1-812.JPG
DSCF1714_1-813.JPG
DSCF1722_1-817.JPG
나머지 서부로 가던 1번 국도의 길들에서 본 장면들. 때로는 구구절절한 말보다, 사진 몇장이 사진에 도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