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ELAND] 약속 (EP.16)

스네이펠스네스에서 다시 새로운 하루. 그리고 하나의 마주침과 약속.

by 대숲사진가
무대를 옮겨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여행은 막바지를 향한다
서부 스네이펠스네스 반도에서 새로운 하루의 시작. 분화구의 정상에 오르기로 한다.
2022년 12월 27일 아침, 스네이펠스네스 반도 Saxhóll Crater


Saxhóll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분화구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숙소를 떠나와 차를 달리던 중 잠시 정차를 했다. 북부로부터 서부까지 넘어오는 길은 너무나도 길고 험했지만, 그 역시 결국 도달해 냈고 여느 때처럼 새로운 하루가 밝았다. 하루의 시작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그래 나 아직 여기서 일출을 어떤 지점에 멈춰서 자세히 바라본 적이 없었지' 하는 생각에 지도 중간에 계획에도 없던 한 분화구를 보고 차를 세운 것이었다.


북부를 지날 때 크라플라 화산의 분화구를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산의 초입부터 길이 막혀서 분화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한번 저지당했던 것도 이 선택에 한몫을 했다. 간략하게 찾아본 결과 지금의 이 분화구는 아마도 한참 오래전에 화산으로서의 활동이 끝난 분화구였던 것 같았고, 그렇기에 분화구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마치 한국의 등산로처럼 완만한 계단이 설치되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주차해 둔 차를 뒤로 한채 천천히 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프스비크 숙소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 부엌


2022년 12월 26일 늦은 밤, 올라프스비크


서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린다. 북부에서 서부로 넘어온 내가 꼭 기억에 오래오래 남기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는 역시 이곳에서 머물렀던 숙소일 것이다. 스네이펠스네스 반도 거의 끝자락까지 들어오면 있는 올라프스비크(Ólafsvík)라는 마을에 있던 한 에어비앤비였는데, 스네이펠스네스 반도가 생각보다 둘러보기에 매우 넓었다는 것과, 내가 서부에서 꽤나 기대하고 있던 키르큐펠(Kirkjufell)의 폭포와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한몫했다.


숙소는 올라프스비크 시내에 (시내였지만 사실 읍내에 가까운 느낌일 정도로 작은 동네였다) 위치한 2층짜리 일반 가정집이었다. 2층과 1층은 서로 같은 하나의 집이었지만 한국의 연립 주택처럼 서로 분리된 공간이었고, 주인집으로 보이는 2층에는 불이 켜져 있어서 집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열쇠를 숨겨둔 위치를 사전에 안내받았고, 셀프로 체크인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2층의 문을 두드릴 일이나, 집주인과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다.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많았던 이 집의 거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부엌이었다. 훌륭한 바테이블과 원목으로 된 싱크대,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안테나를 길게 늘어트린 채 있던 라디오까지 모든 분위기와 조화가 훌륭했다. 아마도 나중에 내가 집을 갖게 된다면 이런 부엌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훌륭한 부엌이었다. 숙소 사진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잘 없는데, 광각렌즈까지 물려서 이 부엌의 온전한 기록을 담고 싶었다. 혼자라서 좀 적적했지만 따스했던 분위기의 이 부엌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키르큐펠 너마저.


다만 서부에 입성한 첫날밤부터 만나길 기대해 왔던 키르큐펠은 또 한 번 나의 링로드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여행의 막바지로 가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정말 동부에서 봤던 밤하늘을 강렬하게 밝히며 춤을 추는 그런 오로라를 정말 딱 한 번만이라도 서부에서 더 보고 싶다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고 그 생각이 향하는 곳은 밤의 키르큐펠이었다. 키르큐펠 폭포와 그 뒤로 보이는 키르큐펠 화산, 그리고 그 모두의 위에서 춤추는 녹색 빛 오로라는 내가 생각했던 가장 전형적인 장면이자 기대해 마지않았던 장면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숙소를 나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계획이란 계획은 모조리 빗나가고 있던 이 여정에서 키르큐펠도 여지없이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사진 포인트에 도착해서 바라본 키르큐펠 폭포는 힘차게 흐르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이 쫄쫄 흐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엄청나게 쏟아진 눈과 꽁꽁 얼어붙은 모습뿐이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대략적인 윤곽만으로 대강 알아볼 수 있어 '이곳이 내가 알던 그 장소가 맞긴 하구나' 하는 정도의 식별만 가능했다.


"정말이지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계획은 하나도 없구나!"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유독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삼각대를 다시 어깨 위로 매며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부로부터 약 500km를 넘게 달려온 피로감이 그제야 급격히 몰려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먼 길을 달려오고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왔던 나의 다부졌던 각오는 그렇게 모래성처럼 스르륵 무너져 내렸고 나는 다시 숙소로 차를 몰아 돌아가 뒤늦은 잠을 청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남은 두 번의 기회 중 한 번이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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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7일 아침, 스네이펠스네스 반도 Saxhóll Crater


새롭게 발을 들인 무대에서 첫 발걸음이 살짝 구겨진 기분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서부에서 맞이하는 아침 해는 또다시 떠오르며 다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다행히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전에 서둘러 계단을 올랐던 덕에, 다행히 일출을 분화구에서 맞이해 보자는 나의 기대감에 응답할 수 있었다.


남부의 유한 이미지와, 동부와 북부를 넘어오며 험준하고 거대한 이미지가 있었다면, 서부가 주는 느낌이 또한 달랐다. 아마도 장엄하다는 느낌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시야에 걸리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끝없이 탁 트이는 시야가 주는 청량감과 개방감이 있었다. 분화구에서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위에 해가 서서히 선을 넘으며 이내 햇살이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분화구 전체 뷰와 일출을 한 번에 담고 싶다는 욕심을 그 순간 같이 부리며 카메라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챙긴 광각렌즈의 화각을 한참이나 벗어나버릴 만큼 그 분화구가 거대했다.


'얼마나 큰 폭발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 한번 자연의 거대함을 느끼며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최선을 다해 기록을 담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순간의 내가 오롯이 즐기게 가만히 놔두었다. 드넓은 지평선 위로 솟아나는 해의 모습. 그 뒤로 자그맣게 보이는 더 넓게 펼쳐진 수평선의 광활함,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여전히 남은 내가 가야 할 길들. 그 길 위에서 내 앞에 나타날 서부의 모습과 그에 대한 기대감까지. 일순간에 뒤섞이며 설렘이라는 감정으로 빚어진다. 앞선 여정들에서 지치고 힘들었던 감정도 잠시 내려둔 채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는 날이 밝은 하늘 아래 분화구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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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하루는 또 시작했다. 나의 여정도 아직 길이 많이 남았다.


2022년 12월 27일 아침, 스네이펠스네스 반도 Djúpalónssandur 해변 인근


서부에서는 사실 계획이 전혀 없는 게 이곳에서의 여정에 있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유일하게 보고 싶어 했던 키르큐펠 폭포에서의 오로라가 혹한에 가로막혀 볼 수 없게 된 이후 스네이펠스네스 반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반도 안에서 하나로 이어진 길들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물론 이곳도 꽤나 넓은 지역이었기에 이곳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것도 나름 큰 일이라 할만했다. 서부의 장엄함과 광활함과 정면으로 맞서며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서 차를 달린다.


그즈음, 분화구를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구글맵에서 디우팔론산뒤르(Djúpalónssandur)라는 지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해변가의 이름인 듯했는데, 반도 가장 끝자락에 걸친 574번 국도를 돌고 있던 와중에 중간에 빠지는 샛길을 타면 이 해변으로 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부를 지나올 때 시간 상 비크와 디르홀레이를 지나쳐야만 했기 때문에, 화산활동이 깎아서 만들어낸 검은 모래 해변을 다른 기회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침 강하던 차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차를 곧바로 그 샛길로 틀었다.


약 2km 남짓한 샛길을 타면서도 느꼈지만 도로 양옆으로는 뾰족뾰족한 화산암들과 그 위에 다시 새하얗게 뒤덮인 눈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다. 서부는 아이슬란드에서 화산활동이 가장 활발했지만 대부분의 화산들은 지금 사화산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뜨거웠던 화산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화산암들, 그리고 바람에 깎이고 떨어져 나가 날카롭게 벼려진 그들의 모습 위에 다시 퍼붓듯이 떨어져 새하얗게 뒤덮은 눈을 보면서 마치 자연이 선사하는 열정과 냉정의 공존과도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 좁은 길을 지나면서도 몇 장의 기록을 빼먹지 않았고, 이내 샛길의 양옆으로 바닷가가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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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의 끝에서 해변가의 초입이 나를 반겼다.


샛길의 끝에는 의외로 말끔하게 정돈된 개활지이자 주차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기분 좋게도 주차장에 다른 차는 없었다. 즉 지금 이 순간 이 해변가를 거닐 수 있는 존재는 나 혼자 뿐이라는 뜻이었다. 일출을 기분 좋게 보며 시작한 하루의 초반부터 바로 이런 숨은 보석 같은 바닷가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해변가로 내려가는 길에는 눈이 더더욱 깊게 쌓여 있었고, 뾰족하게 솟은 화산암들도 도로 양옆에서 보던 발목 정도의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을 여러 자루 땅에 꽂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위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와중 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쌓인 눈이 해변가로 내려가려던 발걸음을 끝끝내 방해하고 있었다. 눈을 해쳐가며 거대한 화산암들의 돌무더기를 지나쳐간다.


북부와 서부에서부터 내내 멀찍이 떨어져서만 보던 날카로운 화산석들을 그 순간에 아마 처음으로 가까이 지나쳐가며 봤던 것 같다. 나를 위협하지 않는 상황에서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물론 바닷가 근처로 내려가는 이 길에 유독 이런 바위들이 빙 둘러서 서있다는 것은 필시 이곳도 작은 크기의 폭발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런 신비로움과 과거의 폭발을 상상해 보다가 문득 나를 에워싸고 있던 뾰족한 바위들이 모두 사라졌고, 내 발밑에는 새까만 색깔의 조약돌들이 밟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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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로 내려 가던 길. 그 길을 가로막고 나를 애워싸던 뾰족한 화산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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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바위들이 나를 가로막지 않게 되었고, 내 발 밑에는 이런 고운 자갈과 조약돌들만 밟히기 시작했다.


발 밑에는 새하얀 눈과 검은 자갈과 조약돌뿐이었다. 그 흑과 백 사이를 내딛는 나의 발걸음으로부터 이들이 찰방찰방거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고개를 앞으로 다시 들 때쯤에 마침내 해변가와 마주할 수 있었다. 황금빛의 빛나는 모래는 아니지만, 차분한 잿빛으로 겨울 한가운데의 햇살과 함께 반짝이고 있던 검은 모래의 해변이었다. 약 8년 전, 분명히 남부의 비크에서 봤던 검은 모래 해변이었지만 이곳 서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이 자체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무엇보다, 이 순간 이 멋진 해변가를 거닐고 있던 것은 나 혼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서부의 겨울바다가 몰아치는 파도도 사납기 그지없었지만 이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검은 조약돌들에게 가로막혀 부서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짤막한 영상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고, 잠깐이라도 해변가를 느긋하게 걸어본다.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 잠시나마 온순해진 바람과 얌전해진 날씨. 언제든 다시 돌변해 내게 달려들 수 있었지만 적어도 이때만큼은 모두가 날 돕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이 유난히도 쨍하게 카메라에 담겨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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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해변가에서 내가 내려온 길을 뒤돌아봤다


즉흥으로 구글맵에서 발견하여 잠시 샛길로 빠져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마치 운명인 것만 같았다. 이미 이 여행에서 계획과 약속 같은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가 되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키르큐펠 대신 난 서부에서 보는, 그리고 아마도 이 여행의 마지막 오로라를 이곳에서 볼래.'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단 한 번이 남았고, 난 그 정답이 이곳일 것이라고 믿으며 약속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뒤를 돌아보니 내가 해변가까지 내려온 화산석과 검은 자갈길이 보였고, 그 뒤로 스네이펠스네스 요쿨이 우직하게 버티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하루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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