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처럼 나도 어쩌다 보니 별로 한 것 없이 2023년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그러기를 벌써 몇 번째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것이 이러다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아마도 내 묘비명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럼에도 왜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이루지도 못할 버킷리스트를 쓰는 것일까? 인간은 꿈을 먹고사는 존재라서 그럴까?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하나 남았던 것이 ‘희망’이었기 때문일까?
올 새해에도 난 꿋꿋하게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써 본다. 일본어회화 도전은 매년 단골 메뉴이고 새로운 게 추가되었다. 바이올린 독학으로 배우기, 셔플댄스 배우기 등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꿈이 야무지다. 그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이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와 ‘희망’은 인간의 가슴을 뛰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엔돌핀이나 도파민 같은 것이다. 그것마저도 생각해내지 못한다면 의지박약 한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비록 한 해를 보내고 연말에 무엇 하나 성취한 것이 없을지라도 그 버킷리스트가 있었기에 일 년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다.
달리는 말 앞에 당근을 내미는 것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히 큰 차이가 있다. 비록 그 당근이 달리는 말을 기만하는 것이긴 해도 말을 달리게 하는 역할은 충분히 한다.
우리 고달픈 인생에게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이런 새해와 희망이라는 당근을 보여 주어야 또 일 년을 힘차게 살지 않겠는가?
삼국지에 보면 망매해갈(望梅解渴)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위나라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가 군사들이 목이 말라 갈증에 괴로워하자, 저기 재 너머에 매실 밭이 있다고 감언이설로 속이자 군사들의 입안에 침이 고여 목마름의 위기를 넘겼다는 얘기다.
이처럼 매년 다가오는 새해는 우리에게 망매해갈과도 같은 것이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실상은 없지만 우리네 인생은 그 신기루에 또 속고 속는다.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만 어디 일 년이 매일같이 새롭던가? ‘새해’의 프리미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기에 살다 보면 어느새 ‘희망’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지고 만다. 진통제 알약을 먹어도 그 지속효과가 겨우 서너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필부필부들에게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이‘새해’를 일 년 내내 새해처럼 인식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어찌 보면 외계인 같은 존재이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단순하게 활력이 넘치는 성정을 가졌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 참고 견디어내는 데 탁월한 성정을 가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새로움과 희망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동경만 하는 삶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신기루 같았던 동경을 마침내 현실로 만들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인고의 시간을 이겨 낸 결과물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는 새해라는 희망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함께 제시되어야 할 단어이다. 고진(苦盡)이 없는데 어찌 감래(甘來) 할 것인가?
우리 후손들에게는 점점 잊혀져 가는 역사이지만, 6.25 전쟁 때 파죽지세로 남침한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 전투의 치열함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였을까? 값진 오늘의 현실은 어제의 피와 땀, 눈물 흘린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인생이 허구 한 날 우물쭈물하다가 세월 다 보내고 마는 것은 삶을 너무 쉽게 여기고 수고하지 않고서 열매를 따겠다는 게으르고 안일한 속성 때문이다.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할 때에도 적당히 스마트폰 보면서 슬슬 시간만 때운다면 아무 운동 효과가 나지 않는다. 이마에 땀이 나도록 내 두 발로 뛰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있어야 건강을 보상받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행동하지 않는 ‘희망’은 공허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이치는 참 공평하다. 다만 인간들이 불공평하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