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 것은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물론 모든 음악적 경험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니까요.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라면 더욱 그렇고요. 그럼에도 음악적 경험은 기이합니다. 음악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고,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최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음악을 듣는 법』의 저자 오카다 아케오는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시대착오적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음악은 말 너머에 있는 것,’ ‘언어로 포획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이라는 식의 음악에 관한 서술은 모두 낭만주의에서 시작한 것이라면서요. 음악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한, 아직도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서 빠끔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궁극의 음악 체험이란 언제나 기습이고 전율이고 두려움이다.
오카다 아케오, 『음악을 듣는 법』 P. 46
그렇다고 저자가 음악의 신비로운 경험을 모르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어떤 음악을 듣고 ‘피아노 음악이네’ 같은 인식이 들기도 전에 이미 직관적으로 ‘오, 좋다!’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 심지어 음악과 만나는 일에는 ‘비범한 체험’이 있다고도 말해요. 비범한 체험이란 음악이 듣기 좋거나 아름다운 수준을 넘어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이어서 심지어는 위험하기까지 한, 그런 경험입니다. 찬란하면서도 아찔하고 황홀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아케오가 말한 ’비범한 체험’이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세이렌의 신화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불온한 음악을 규제한 플라톤의 경우는 아름다움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음악의 기이한 힘을 인식한 또 다른 예입니다.
비범한 음악적 경험은 누구든 한 번쯤 있을 만합니다. 가령 저의 경우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첫 번째 곡 ‘Stabat Mater dolorosa’를 들으면 심장은 쫄깃해지고 어깨는 움츠러듭니다. 두 가수가 노래하는 두 개 선율이 불협화음으로 부딪혔다가 교묘하게 협화음으로 다시 멀어지는 그 패시지에서 말입니다. 미분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마침 마우리치오 카겔이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만든 ‘Ludwig van’ 연주 영상을 보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로 교향곡 7번 2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이 이상한 조율은 음악이 진행될수록 차원을 달리하며 왜곡되면서 살갗의 솜털들이 뾰족하게 서는 듯한 오묘한 불/쾌감을 주었거든요. 마치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일그러진 초상을 보았을 때처럼요.
토루 타케미츠의 현악4중주 《A Way a Lone》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상했습니다. 악보를 보면서 분석할 때였습니다. 깊은 바닷물의 굽이치는 표면처럼, 이리저리 너울대는 밀도 높은 화음들이 무겁고 나른하게 움직이는 음악인데요, 음악을 분석한다는 건 음악 구석구석을 면밀하게 뜯어보는 일이잖아요. 그러면서 이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어 나가는지, 왜 이런 소리가 나는지 이해해 보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원리도 살피고요. 귀로 듣는 것만큼, 때로는 그것 이상의 음악적 즐거움이 분석하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해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지고 마는 음악이었어요. 논리보다는 직관에 가까웠습니다. 발전적 음악도 아니고 절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요.
분석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여러분은 왜 음악을 분석하시나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게 분석은 음악을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난해한 현대음악의 경우 분석은 더 밝은 빛을 발합니다. 물론 그런 음악일수록 분석 자체가 까다로운 면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반복해서 듣고 긴 시간 악보와 씨름하다 보면 그 복잡하게 들리던 음악에서 나름의 규칙이나 질서 같은 것들이 손에 잡히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그 음악이 왜 그렇게 들리는지가 설득돼요. 어떨 때는 분석하기 전과 분석 후에 듣는 음악이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도 합니다. 음악에서 마침내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면 얼마간의 쾌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앞에서 언급한 페르골레지와 카겔의 음악은 아케오가 말한 비범한 체험에 근접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타케미츠의 음악은 다른 경우인 것 같아요. 앞의 두 경우가 음악을 듣는 순간 신체적으로 감각되는 독특한 경험에 관한 것이라면, 타케미츠의 경우는 음악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인식해 보려는 데서 일어난 상황이니까요. 그렇지만 이 사례들은 모두 음악적 경험을 말로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아케오의 주장이 인상적인 것은, 음악에는 이렇듯 말로 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결국 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음악은 언어로 번역될 때 더 큰 감동을 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언어가 있어야만 음악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해요. 음악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풍부해질수록 더 깊숙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음악 듣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힐링음악이나 배경음악, 명상음악처럼 음악의 의미가 아니라 사운드 자체만을 듣는 요즘의 청취 문화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고요.
음악에 말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기습적으로 찾아든 음악적 감동은 말로 하기 어려운 전율을 일으키지만, 그 감동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 분석하고 나름의 의미를 포획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도 아닙니다. 제가 타케미츠 음악을 만났던 경험처럼요. 여러분이 가진 음악에 관한 언어는 무엇인가요? 그 언어들은 음악적 감동을 촘촘하게 만드나요? 혹 그 감동을 제한하진 않나요? 그 전에, 음악에 말이 필요할까요?
61호_VIEW 2024.02.15.
글 ∙ 에디터 S
책임편집
씨샵레터 구독하기
만드는 사람들
정경영 계희승 강지영 권현석 김경화 정이은
에디터S 소록
#VIEW #에디터S #오카다아케오 #음악 #음악분석 #책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