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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샵레터 May 30. 2023

애도일기: 떠나간 사람이 남긴 것

37호 VIEW

                                                  

                                                   글 ∙ 소록    

                                                                에디터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그러나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극히 드물게 일어난다. 
어린 시절, 당신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오후를 얼마나 더 기억할 수 있을까? 
많아야 네다섯 번? 혹은 그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생에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스무 번 정도? 
모든 것은 영원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 폴 볼스의 소설《마지막 사랑》중



소식


ⓒ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Neo Sora/MUBI


점차 짧아지는 봄을 조금이라도 누려보고자 벚꽃을 보러 가던 날, 이상하게 기분이 차분하고 좋았습니다. 봉오리진 꽃들이 시드는 것은 한 순간이라지만 그날 보았던 만개한 꽃들과 푸른 하늘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저녁, 한껏 차분해진 마음으로 포털을 훑어보던 중,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2023년 3월 28일,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 별세’


별안간 멈춰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갑작스레 슬픔에 잠식되는 듯한 마음, 마치 내 일생의 가장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처럼 일렁이고 멀미가 나는 듯한 기분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작품과 삶의 방식을 동경해왔기 때문일까요? 그의 죽음이 사무치게 슬펐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의 흔적을 더듬으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여린 숨소리로 가득찬 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작은 틈 속에 숨어 있던 슬픔들이 삐져나와 그 속에 잠겨버리는 듯한 느낌이 일었습니다. 단 한 번 만난 적 없는 그의 삶이 내 마음에 그리움으로 남은 것일까요. 그 슬픔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 죽음에서 삶으로, 생전 그의 몇 가지 조각들을 따라 조금은 오랜 여정이 될 혼자만의 고별을 기록해보기로 했습니다.



잠수


‘암은 편도선 안쪽, 3기 판정. 림프절까지 전이될 수 있다. 현재 3개 있음.’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아티스트이자, <마지막 황제>(1987)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그래미를 석권한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인후암 판정 이후 모든 활동을 중단합니다. <코다>(Coda)는 사카모토가 아티스트로서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2012년부터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한 2014년을 거쳐 8년만에 선보인 새로운 앨범 [async]를 선보이기까지 지난 5년의 여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입니다.


ⓒ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Neo Sora/MUBI


쓰나미로 모든 것이 쓸려나간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는 마치 물에 빠진 피아노의 시체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대개 목판 여섯 개를 겹친 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청난 압력을 가해 악기의 틀을 잡고 일종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내부에서 지지되고 있는 현들까지 모두 합하면 몇 톤의 힘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죠. 그는 이러한 과정 전체가 어찌 보면 자연에 있던 물질을 가져와 인간의 공업력과 문명의 힘을 써서 거푸집에 넣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소리의 존재마저 조율하려 애를 쓰는 현상에 관해 그는 소리 역시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닐까 질문합니다. 물을 한가득 먹은 피아노의 소리는, 사실은 쓰나미가 되찾은 자연 본래의 소리가 아닌가 하고요. 자연의 힘에 의해 부서지거나, 으스러진 악기를 두고 악기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거나, ‘소리가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소리의 쓸모’를 대하는 인간의 기준을 의심하는 겁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가 인간의 힘으로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자연으로 되돌아간, 물에 빠진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겐 그게 자연스러운 소리겠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NEO SORA/MUBI


우리가 이야기하는 듣기 좋은 소리, 정확한 소리란 진정 자연스러운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미국 9 • 11 테러 사태 때 저는 테러가 일어난 곳에서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간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선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하거나 예술 활동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평화로운 일상이 유지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겠죠.
제가 음악과 함께 사회운동을 계속하는 이유입니다.”

—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NEO SORA/MUBI
ⓒ Unsplash


세상에 만연한 비극을, 인간에 대한 분노를,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은 생사의 무력감 속에 젖어 들어갈 때마저도 과연 하나의 사랑은 백만 개의 혐오를 지워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할까요? 9.11 테러 이후 그가 처음 들었던 “Yesterday”, 그 멜로디를 듣다 사카모토는 문득 자신이 일주일간 음악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매일 음악에 둘러싸여 살아왔는데도 도시 전체에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이야기하죠. 음악마저도 삼갈 정도의 슬픔. 그는 음악이나 문화는 평화롭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음악은, 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귀하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모든 건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오후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 기억은 다시 눈이 녹듯 사라져버립니다.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 앞을 지나가는 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저쪽으로 날아갔을까요?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으로


ⓒ Unsplash


하지만 만날 길 없는 오늘, 남겨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한 번 더 묻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에 대해.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소리에 대한 동경. 혼란 속에서 그의 삶을 뒤따라 가다 이제서야 조금은 그의 음악과 삶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때때로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차피 생은 짧고도 무력하게 흘러가지만, 덧없이 사라져버릴 그 생의 순간의 소리란 것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남은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가 남긴 음악과 의지가 내 안에 깃들길 바랍니다. 여기 남아 그의 뜻과 마음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으로요.


삶에 지친 날 작은 고요와 안정을 주던 그의 음악에 작별 아닌 감사를 남기며.
May he Rest in peace, Hope he rest in peace


Ryuichi Sakamoto (1952. 1. 17 ~ 2023. 3. 28.)








37호_VIEW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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