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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샵레터 Aug 20. 2024

베토벤은 위대하다는 착각


                                           글 ∙ 계희승

                                                공동연구원




궁극의 질문

이미지 출처: Paris2024.org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파리 ★림픽(1)이 한창입니다. 우리 선수들 응원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시차가 있어 주요 경기 대부분 업무 시간 이후에 열리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같은 이유로 잠 못 이루는 밤이 거듭되면서 누적되는 수면 부족이 문제지만 이 순간을 위해 긴 시간을 견뎌 낸 선수들의 노고에 비하면 어디 비할 바인가요. 경기가 끝나면 결과와 관계없이 자주 듣는 표현이 있습니다. ★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정해 준다는 것. 하늘도 감동할 만큼 간절하게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일 겁니다. 더불어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운’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피땀 흘려 성취한 결과를 ‘운’으로 치부하는 게 실례 아닌가 싶지만 ‘하늘이 정해 준다’는 표현은 필연적으로 ‘운’의 존재를 내포합니다.


(1) ‘올★픽’ 명칭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공식 자산이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승인 없이 이 용어를 사용해선 안 돼요. 이 글에서는 ‘★림픽’으로 대신합니다.


니들이 다 들어 봤어?

작곡가의 ‘위대함’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양합니다. 문제는 그 평가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래서 완벽하지 않다는 겁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어느 시점부터 베토벤은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베토벤 시대 그만한 작곡가는 없지 않았냐고 단정하지 마시길. 베토벤 정도의 명성과 인기를 누렸던 작곡가는 수두룩했습니다. 베토벤은 그냥 “평균 이상의”(above-average) 작곡가였다는 발언으로 북미 음악(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음악이론가 필립 유엘(Philip Ewell) 뉴욕시립대 헌터컬리지 교수가 던진 질문도 비슷합니다. 베토벤을 위대한 작곡가, 더 나아가 성역으로 여기는 당신들이 같은 시기 활동한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도 다 들어 봤냐는 겁니다.

이미지 출처: Leipziger Volkszeitung

유엘의 반문은 유치해 보이지만 붙잡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품의 ‘위대함’은 상대적으로 평가되는 것인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분명 상대적인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음식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워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표현이 물론 문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어 봐야 하고, 그것도 좋은 것을 먹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취향’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이 문제는 더욱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이것저것 좋은 것 아무리 먹어 봐도 흔히 말하는 ‘먹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별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서 돈을 씁니다.


잠깐 이야기가 샜는데, 유엘의 도발(니들이 다 들어 봤어?)에 답하면 저는 베토벤 시대 활동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꽤 들어 봤습니다. 그냥 듣기만 한 게 아니라 작곡가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병행했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기준으로 만 6년 3개월째 하고 있는 방송 덕분입니다.) 작곡과 이론을 전공하고 제법 좋은 귀와 취향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음악학자로서 단언하건대 베토벤 못지않게 ‘위대한’ 작곡가로 기록될 수도 있었던 작곡가는 여럿 있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시간 나실 때 토요일 오전 11시로 자리를 옮긴 〈KBS 음악실〉의 장수 코너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한 번 들어 보세요. 주말 오전 1시간이 아깝지 않은 음악과 이야기 들려 드립니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

여기서 방점은 ‘기록될 수도 있었다’에 있습니다. 될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되지 못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릅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행복(성공)을 위한 수많은 조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를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를 차용해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작곡가에게도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활동한 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가 좋은 예입니다.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에 따르면 조스캥의 성공은 ‘음악’만으로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조스캥이 활동한 시기는 하필 인쇄술을 사용한 악보 출판의 가능성이 열린 시대였는데, 마침 이게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본 페트루치(Ottaviano Petrucci)라는 출판업자가 있었고, 또 마침 취향도 있었던 그가 조스캥의 팬이었다는 것. 인쇄술의 활용으로 악보의 대량 생산 및 유통이 가능해졌고, 조스캥의 음악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인간 중심의 세상이 다시 찾아온 르네상스 시대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한몫합니다.


이 성공(혹은 실패)의 조건은 ‘안나 카레니나 법칙’ 운운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인생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성공이라는 건 때와 장소가 맞아야 하고, 내 능력을 알아보고 나를 도울 능력이 되는 귀인을 만나야 가능하다는 것. 이런 것들은 대개 ‘노력’으로는 충족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물론 ‘노력’해 볼 수는 있지요. 좋은 학교, 가능하면 유학을 가서 나를 도와줄 능력이 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라도 잡으려고 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른바 ‘네트워킹’이 유행처럼 강조된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는 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베토벤의 경우

베토벤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베토벤의 성공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하필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했다는 점과 E. T. A. 호프만이라는 열렬한 지지자가 있었다는 사실. 비슷한 시기 궁정음악과 교회음악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쯤 오늘날의 상업음악회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작곡가들이 음악비평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작품을 평가하기 시작한 것도 고려해야 할 요인입니다. 여기에 베토벤의 작품이 하필 19세기 독일 유기체주의에 걸맞은 이상적인 음악이었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베토벤은 마치 이 모든 것을 위해 태어난 작곡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베토벤과 같은 시기 활동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걸작’이 오늘날 기억되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갑니다. 여러 조건 중 하나만 빠져도 안 되거든요.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싶지만 그렇게 비관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혹은 하지 못하는) 그 많은 작곡가들이 전부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람이 “나는 호랑이가 아니니까 죽어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기 바빠요. 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흐만 해도 그래요. 그 많은 칸타타를 썼지만 바흐에게는 그저 매주 해야만 하는 (신성한) 일이었을 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매주 방송을 위해 수많은 음악을 듣고 선곡해 원고를 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일은 제 본업도 아닙니다.




운과 재능, 그리고 노력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그래서 결론은? 운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는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이것도 많이 양보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운이 전부라고 했을 것 같아요. 운명론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살고 보니 갖고 있는 재능과 노력을 다 쏟아부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반면, 그와 반대로 재능이나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잘 풀리는 일도 있더라는 겁니다. 그럼 또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인생의 8할 이상이 운이라면 노력해 봐야 소용없는 것 아니냐? 정말로 그렇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해서 안타까운데, 인생의 성공은 운이라는 말이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운과 재능, 노력의 상관관계에서 우리 의지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력을 왜 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최근 ★림픽 출전하는 선수들 보면서 많이 느끼는 건데, 라이벌의 부상으로 메달을 따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 때문에 메달을 따지 못한 건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는 말이 진심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이건 진정 노력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파리 ★림픽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벌써 아쉽습니다. 선수들이 지난 4년(이번에는 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으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했으니, 이젠 내 차례인가 싶어 겁이 나기도, 또 설레기도 하네요. 넌 지난 4년간 뭐 했냐고 물어볼 것 같아서요. 그때가 오면 당당히 자랑할 수 있도록 오늘도 달려 봅니다.


«더 읽어볼 만한 글»
 
1️⃣ 계희승. ““베토벤 계속 들어야 해?”: 영화 ≪헌트≫의 수사적 질문에 대한 음악학자의 변(辯).” 『음악논단』 47 (2022): 1-26.
2️⃣ 신동진. “쉔커식 분석이론을 둘러싼 북미 음악이론계의 ‘백인종 프레임’(White Racial Frame) 논란.” 『음악이론포럼』 28/1 (2021): 163-184.  
3️⃣ Ewell, Philip A. “Music Theory and the White Racial Frame.” Music Theory Online 26/2 (2020), https://mtosmt.org/issues/mto.20.26.2/mto.20.26.2.ewell.html










65호_VIEW 2024.08.15.

글  계희승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공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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