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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샵레터 Oct 17. 2024

어느 음악학자의 사사로운 연극 '듣기'

          

                                       글 ∙ 김경화

                                                전임연구원





때로는 듣지 않기 위해서 듣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언뜻 역설처럼 들리지만, 이 표현은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산만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선택한 소리에 집중하는 우리의 일상적 청취 습관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이나 소리를 골라 듣습니다. 그러나 그 듣기 행위는 한편, 원치 않는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을 지켜내겠다는 단절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저만해도 주변에서 흘러들어오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착용하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불편한 소리를 견뎌낼 용기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듣고 싶지 않은 소리에 귀를 닫고 원하는 소리에만 집중하는 이런 습관은 불필요한 연결과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마음의 장벽을 쌓아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소리가 넘쳐나는 시대,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듣기란, 마음을 나누는 일

얼마 전,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를 보았습니다. ‘내 안의 소리를 들으라’는 메시지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고독을 소중히 여기는 주인공 벨라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입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중년의 문예창작과 교수 벨라, 소설가이기도 한 그녀는 오랫동안 신작을 내놓지 못하고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을 쓰겠다고 그를 찾아온 야심 찬 학생 크리스토퍼와 만남을 통해 벨라는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던 자기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등장인물은 벨라와 크리스토퍼 단 두 명뿐. 두 주인공의 대화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지만, 관객에게만 들려주는 벨라의 방백은 청중을 제3의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듯했습니다. 벨라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꺼내 놓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저는 마치 그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벨라의 연구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대 세트와 낮게 깔린 어두컴컴한 조명, 극 중간중간 미세하게 울리는 진동,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벨라의 노트북 자판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걸음 소리를 연상시키는 소리,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이 맴돌듯 빙빙 도는 원형의 세트장까지, 섬세하게 고안한 무대 장치는 극에 집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든 건 차분하고 밀도 있게 들려주는 벨라의 이야기와 숱한 문학적 알레고리들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MHNsports 강시언




연결하는 듣기

어둠 속에서 등장한 벨라는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조심스럽게 관객에게 말을 건넵니다.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의 중년 문예창작과 교수가 낯선 청중 앞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잘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저 밖에 있습니다...” “이 청중들은 친절할까요? 자비로울까요? 쉽게 산만해질까요? 아니면 이 여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까요...?” 벨라는 청중을 향해 질문하며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습니다. 이내 벨라는 자신의 가장 사적인 생각과 감정을 꺼내며 청중에게 다가섭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어머니와의 추억, 10년 간의 교직 생활, 오랜 기간 신중하게 모아온 초판본 컬렉션에 대한 애정, 그의 삶을 지탱해 온 문학 이야기까지. 자신의 작은 세계를 관객에게 열어 보이고는, 그가 얼마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며 살아왔는지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세월은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갑자기 덮쳐오는 거에요... 그리고 난 문득 깨달아요, 세상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며 살아가는지를. 스스로를 마치 캐비넷 안쪽 깊숙이 넣어진 채 잊혀진 물건처럼 만드는 거예요. 난 불이 켜지지 않는 손전등이에요. 난 녹슨 병따개예요. 아무런 가치 없는 고고학적 유물...” 

연극〈사운드 인사이드〉중 벨라의 대사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온 벨라의 삶에 전환점이 된 것은 크리스토퍼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소설을 매개로 크리스토퍼와 나눈 대화는 단순한 생각의 교환을 넘어, 벨라에게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벨라에게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함께 느끼는 것이며, 공감과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크리스토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안 벨라는 그의 존재를 수용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며, 그가 느끼는 외로움과 아픔에 다가서며 감정적 유대를 형성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이들의 정서적 연결은 듣기에서 출발했습니다. 견고하게 세워진 마음의 벽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신뢰와 친밀함의 단계로 들어섰을 때 서서히 허물어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 벨라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스스로가 만들어온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과 연결될 용기를 얻게 되었을 겁니다.

이미지 출처: 라이브러리컴퍼니




내 안의 소리를 들으라

그렇다면 관객의 하나로서 저에게는요? 벨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 저는 단순히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아니라 그의 삶 속으로 초대된 또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벨라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 고백의 목소리에 실려 공간에 흩어진 숱한 감정들이 저에게도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연민이나 동질감을 느끼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마음을 나누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고, 공감했고, 친밀해지는 듯했습니다, 저는 벨라를 듣고 있었던 겁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지 음악이나 소리의 정보들을 잘 읽어내는 청각적 능력만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기꺼이 내주는 일인지 모릅니다.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며 나와 그를 연결하는 소통의 방식이 될 수도 있고요, 외부 세계와 내가 관계 맺는 방식일 수도, 세상 속에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고, 소리에 실려 마음으로 전달되는 그 감정에 공감하는 것일 수 있겠지요. 극이 끝날 무렵 벨라는 자기 내면에서 요동치며 허공을 떠도는 ‘내 안의 소리를 들으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벨라는 자신과 화해하고,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벨라의 그 내면의 소리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불편한 소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불필요한 연결을 거부하는 시대, 불편한 감정까지도 소거하는 시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가 귀 기울일 것은 무엇일까요.


*이 글은 연극의 주요 내용과 별개로 지극히 주관적인 저자의 시선이 담겨 있음을 밝힙니다.








69호_VIEW 2024.10.17.

글 김경화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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