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상은 내가 할게,
피아노는 누가 Chill래?

by 씨샵레터


글 ∙ 에디터S

책임편집




길을 걷다 우연히 버스킹 공연 만난 적 있으시겠지요. 유럽에서는 이런 버스킹 공연이 하나의 거리 공연 문화를 이룰 정도이고, 2000년대 이후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어요. 음악 소리는 그냥 지나칠 거리 위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어 세웁니다. 하나둘 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어쩌다 마주친 음악 연주에 기분 좋은 얼굴로 음악을 감상하겠지요. 버스킹 공연은 이렇게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펼쳐집니다. 그런 만큼 버스킹 공연에서는 바이올린이나 기타처럼 가지고 다니기 편리한 악기 연주, 혹은 목소리로 하는 노래를 주로 듣게 돼요. 피아노같이 무겁고 커다란 악기를 가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미 피아노가 거리에 놓여 있다면 어떨까요?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거리에 놓인 피아노

‘런던 브릿지 밑에서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하는 11살 조지’를 보세요. 피아노 앞에 한 꼬마가 앉아 있고 그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조지’로 보이는 꼬마는 방금 막 연주 하나를 마쳤는지 손바닥을 다리에 문지르며 한숨을 돌리고, 사람들은 그런 소년을 향해 커다란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어요. 소년이 다음 곡을 시작하려고 건반을 피아노 위에 올려도 박수는 쉬이 잦아들지 않아요. 두 번이나 손을 건반에 올렸다 내린 소년은 세 번째에선 박수 소리 위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베토벤의 ‘비창’ 3악장. 그제야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사람들은 연주를 감상해요. 피아노 조율은 엉망진창에 사람들은 왔다 갔다 웅성웅성. 연주에 집중 못 하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꼬마의 연주는 참으로 심상치 않습니다. 조지에게만큼은 그 자리가 다리 밑 거리 피아노가 아니라, 멋들어진 콘서트홀 무대 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로 펼치는 독주 무대인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공공 예술 프로젝트 Play Me, I'm Yours!

마침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은 조지(와 피아노) 덕에 훌륭한 연주를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조지는 피아노 앞까지 제 발로 걸어왔겠으나 피아노는 어떻게 저곳에 놓여져 있던 걸까요? 조지가 자신의 독주 무대를 위해 이 업라이트 피아노를 직접 운반한 것은 아닐 테고요. 그럼요. 사실 이 피아노가 길 위에 놓인 연유는 영국의 설치 미술가 루크 제럼(Luke Jerram)의 공공 예술 프로젝트와 관계 있습니다. 2008년, 제럼은 길거리나 공원, 기차역, 쇼핑몰 같은 공공장소에 피아노를 설치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한 참여형 공공예술 프로젝트 ‘Play Me, I’m Yours’를 시작했어요. 영국 버밍엄에 처음 놓인 거리 피아노는 이후 전 세계 70개국 이상의 도시에 2,000대 이상 설치되면서 커다란 규모의 프로젝트로 확장되었습니다.


제럼의 이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피아노 연주라는 ‘음악 예술’을 중심으로 시도한 참여형 예술의 하나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공공 예술에서 ‘예술’은 주로 ‘시각 예술’ 위주였어요. 그중에서도 설치 작품이나 조형물이 주를 이루었지요. 실제로 공공 예술의 시초는 193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퍼센트 법(One percent law)이었어요. 퍼센트 법은 공공건물을 지을 때 건축 예산의 1%를 예술 작품을 설치하는 데 할당하는 것을 의무화한 것이었는데요. 이 법이 제정된 건, 당시 전쟁 여파로 실직해 거리에 나앉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다 1960~70년대 정도 되면, 예술 경험이 미술관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과 더불어 일상 속 예술 경험을 꿈꾸는 공공 예술이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본격화됩니다. 장르로 자리 잡은 공공 예술은 한 사회의 구성원을 두루 포괄하는 ‘공공’과 예술가의 독창적인 (그래서 때로는 난해하다고 인식되기도 하는)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지향점 때문에 한때 커다란 진통도 겪었지만, 점차 장소의 성격을 고려하고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참여와 소통을 추구하면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image (4).png 이미지 출처: The Slovak Spectator

공공 예술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제럼의 ‘Play Me, I’m Yours!’는 공공 예술의 음악 버전이라고 할 만해요. 아무런 사이도 아니던, 그저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피아노를 매개로 연주자 또는 관람객이 되어 잠깐 동안 느슨하나마 기분 좋은 관계를 맺게 돼요. 관객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놀라움을 표현하거나 옆 사람의 커다란 박수에 덩달아 환호하겠죠. 심지어 피아노가 연주되지 않는 시간에도 피아노는 여전히 떳떳한 예술 작품입니다. 거리에 놓인 피아노 한 대를 응시해 보세요. 매끈하고 말쑥한 겉 표면에 그렇지 못한 투박하고 육중한 몸체와 그 가운데를 가르며 가지런히 놓인 하얗고 까만 막대들의 향연은 영락없는 레디메이드(ready-made) 작품입니다.




홍익문고 앞 그 피아노

제럼의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식의 거리 피아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예술 비영리단체 더 하모니가 제럼의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해 기증받은 피아노를 거리에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났죠. 이른바 서울 스트릿 피아노 프로젝트 ‘달려라 피아노.’ 서울에서 목격한 거리 피아노 하면 신촌역 홍익문고 앞에 놓인 피아노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 피아노가 바로 ‘달려라 피아노’의 일환으로 설치된 거라더군요. 지난 2023년부터는 서울시 차원에서도 문화 향유 사업의 일환으로 거리에 피아노를 설치하기 시작했어요.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피아노 서울’은 우리나라에서도 거리 피아노 문화가 본격화되는 신호탄일까요?



위 영상은 약 9년 전에 업로드되었어요. 신촌역 홍익문고 앞. 까만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피아노를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조금 전 무슨 말이라도 마친 것인지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를 피아노에 올려두는 것으로 영상이 시작됩니다. 남자는 화면 밖에 서 있을 누군가와 어설픈 하이 파이브를 치더니 두 발로 땅을 박차며 일으킨 반동으로 빙 돌아 피아노 건반 앞으로 몸을 향합니다. (방금 전까지 분명 마이크를 사용해 어떤 말이든 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후후-’ 마이크 전원이 잘 켜져 있는지 점검하는 일까지 잊지 않은 남자는 마침내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의 연주는 건반이 아니라 피아노 뚜껑을 때리는 것으로 출발해요. 가던 길 안 멈출 이 없을, 귀와 시선과 몸을 붙들어 매는 인상적인 퍼포먼스입니다.




거리 피아노의 꿈

루크 제럼의 ‘Play Me, I’m Yours!’나 우리나라의 ‘달려라 피아노,’ ‘피아노 서울’ 같은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거리에 놓인 피아노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음악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물론 길을 지나는 사람들만이 아닐 거예요. 피아노 연주자 또한 그 시간, 그 거리를 지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호응하면서 나름대로의 기쁨을 누릴 겁니다. 이런 쾌를 예술 경험이라고 할 만하다면, 거리 피아노는 공공 예술의 성공적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거예요.


런던 브릿지 밑에는 지금도 꼬마 피아니스트 조지가 연주하던 그 피아노가 놓여 있을까요? 조지만 한 또 다른 꼬마 연주자가 그 피아노를 두들기고 있을까요?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연주를 선보이던 11살 조지가 이제는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된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오르며 주목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지 할리오노(George Harliono). 그의 어린 시절 작은 무대가 되어 주던 ‘Play Me, I’m Yours’는 이제 그를 세계 무대 위로 올려다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거리 피아노에서는 어떤 꿈이 피어날까요?


조지 할리아노 -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78호_VIEW 2025.03.20.

글 에디터S

씨샵레터 책임편집자


씨샵레터 구독하기

만드는 사람들

정경영 계희승 강지영 권현석 김경화 정이은

에디터S 박바흐


씨샵레터에서 발행된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에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음악학자는 왜 오픈 소스를 주목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