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씨샵레터 79호 PICK에는 최근 논란의 가운데에 선 AI 생성 이미지가 포함되었습니다. 챗GPT에게 사진을 보내고 특정 애니메이션 화풍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하면 얻을 수 있는 이미지였지요. 씨샵레터에 실린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풍의 그림이었습니다. 지난 호가 발행된 이후 씨샵레터는 몇몇 구독자들의 원성을 샀어요. 작가가 여러 차례 AI 창작에 관한 불편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예술을 주제로 발행되는 씨샵레터가 이에 대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지브리 풍 이미지를 뉴스레터에 실었다는 것이 그 비판의 주된 논지였습니다.
이 글이 AI 생성 이미지 사용에 대한 씨샵레터의 입장이나 답변, 혹은 변명 같은 것이 되진 못할 거예요. 씨샵레터를 발행하는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다만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볼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므로 그 생각의 가닥을 찬찬히 쥐어 가 보려고 합니다. 사실 처음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곱씹을수록 그렇지 않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ChatGPT의 지브리 풍 이미지 생성에 관한 논란은 뜨거워졌습니다. 일본에서조차도, 이제는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는 입장부터 예술가의 창작권 침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어요. 이 글은 이런 논란에서 출발해 AI 기술을 둘러싼 상반된 입장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기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물음이 왜 결국 예술과 윤리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 차근차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3월 26일, ChatGPT는 기존의 AI 이미지 생성 기술을 월등히 능가하는 수준의 신기능을 선보였습니다. 이 기술은 사진을, 길어도 5분 안에 특정 화풍의 그림으로 완성해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 모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지브리 화풍으로 생성된 그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ChatGPT 이용자가 급증하는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ChatGPT에서 일시적으로 그림 생성 기능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정도였어요.
우후죽순으로 생성되기 시작한 ChatGPT의 특정 화풍 그림은 곧 논란을 일으켰어요. 특히 가장 많은 이미지가 생성된 지브리 풍 그림에 대해서는 팬들의 의견도 갈렸습니다. 자신의 사진이 지브리 풍 그림으로 바뀌자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 같아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과거 AI 기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던 것을 언급하면서 우려하기도 했어요. 지난 2016년 NHK는 다큐멘터리 ‘NHK 스페셜: 미야자키 하야오-끝을 모르는 남자’를 공개했는데요. 여기서 그는 AI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강한 반감을 표현했어요. "이건 삶 자체에 대한 모독"(1)이라고 말했죠.
(1) 출처: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90497.html
팬들의 두 입장이 예술가가 기술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기술과 예술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쪽 입장 모두 어느 정도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에요. 예술의 역사가 기술 안에서, 기술을 통해, 기술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제는 새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은 납득할 만합니다. 음악의 역사만 봐도 그래요. 인쇄 기술의 발전이나 악기 제작 기술, 녹음 기술처럼 역사적 시기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기술은 그 자체로 음악 장르와 양식, 기법적 변화만이 아니라 음악 창작과 향유 문화가 달라지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해 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입장은 자칫 ‘기술이 예술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으로 쉽게 미끄러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해요. 기술결정론은, 극단적인 경우, 기술의 변화를 거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 있어요. 새로운 기술 환경에 따라 우리들 삶의 형식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 변화가 기술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에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환경의 복합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엮임과 연결을 함께 고려해야만 하니까요.
AI 생성 이미지를 비판하는 입장은 어떤가요? 이 역시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어요. 계산하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축적된 예술가의 시간이 ChatGPT의 AI 기술을 통해서는 단 몇 분으로 축소돼요. 그런 기술로 생성된 그림에는 예술가의 시간도, 고민도, 정성도, 정신도 없어요. AI 생성 애니메이션에 대해 한때 미야자키가 “이건 예술이 아니다. … 역겹고 소름이 끼친다. … 기계적인 창작물은 예술적 가치가 없다”며 완고한 입장을 보인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일 겁니다. 이런 의견에 거의 동의해요. 그런데 동시에 이런 질문도 생겨요. ‘대체 예술이 뭐길래!’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건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예술”은 뭘까요? 활동으로서의 ’창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도움 될 거예요. 창작물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한 예술가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구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 창작일 경우, 그것은 작곡가가 선택한 특정한 소리 재료를 그가 오랫동안 연마하고 습득해 온 작곡 기법(뿐만 아니라 음악 역사, 양식, 장르, 문화, 악기, 재료)적 지식을 근거 삼아 음악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공해서 하나의 온전한 소리 형태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때의 ‘아이디어’란 대체로 예술가의 미적 직관, 내면적 표현 욕망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해요. 그러므로 음악 작품, 곧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의 자의식, 혹은 그의 개성과 주관적 표현을 담은 창작물인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가 오랫동안 갈고 닦은 예술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그의 독창성을 고유한 형상으로 완성한 결과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예술 개념은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독특한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중세 시대에도 음악이 이런 거였을까요? 중세 시대에 ‘음악’은 심지어 소리에 관한 것도 아니었어요. 중세의 음악이론가 보에티우스는 음악을 세 가지로 분류했어요. 무지카 문다나, 무지카 후마나,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 각각 우주의 음악, 인간의 음악, 악기의 음악이라고 옮길 수 있어요. 그리고 이때의 ‘음악’은 ‘질서’ 혹은 ‘조화’로 바꿀 때 그 의미가 더 명확해져요. 그러니까 중세 시대에는 질서 혹은 조화를 그 자체로 음악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물론 이 시기엔 ‘예술’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어요. 예술 개념, 그러니까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개성, 주관적 표현 같은 생각이 생겨나고 구체화된 건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러서였으니까요.
말이 길어졌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AI 창작을 부정하는 입장이 ‘예술이란 인간의 고유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성이 실현되는 영역’이라는 전제를 근거로 한다면, 그때의 예술 개념은 19세기에 만들어진 예술에 관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게 원래 그렇게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면, 우리 시대에 예술이란 개념을 어떻게 다시 새길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 할 거예요. 말하자면, AI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거예요.
기술을 옹호하는 쪽도, 그리고 비판하는 쪽도 모두 나름대로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어요. 그렇지만 둘 다 다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전자가 기술과 인간 문명의 관계를 납작하게 이해한 나머지 ‘기술이 전부다‘ 같은 생각에 빠질 우려가 있다면, 후자는 18~19세기에 형성된 예술 개념의 근대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지브리 풍 AI 생성 이미지 논란을 ’기술과 예술의 관계‘로만 보는 것이 이 문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에 제한적이라면, 이 논란의 초점을 다른 데로 옮겨봐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AI 기술을 일상처럼 흡수하는 사람이에요. 기술과 디지털 친화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컴퓨터나 휴대폰을 업데이트하면 새로운 기능을 꼭 한 번씩은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고요. AI 생성 이미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게 나오자마자 즉시 실행해 봤어요. 마침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일에 들이는 수많은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던 중 지난 씨샵레터 79호가 발행된 후 지브리 풍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냐는 의견을 받은 거예요. 서둘러 미야자키 하야오와 AI에 관한 기사를 찾아봤어요. AI 생성 애니메이션, 넓게는 AI 창작에 관한 그의 생각은 분노에 가깝더군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평을 토로하는 것으로만 볼 수는 없었어요. 그건 발전하는 현대 기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대착오적인 고집이기보다, 한 예술가의 삶을 가벼이 다루지 말아 달라는 호소에 가까워 보였어요. 창작물 자체는 단순한 ‘결과물’로 인식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알잖아요. 그 안에는 창작자가 하루하루 살아온 삶의 방식과 촘촘한 감정들, 견뎌온 노동과 시간이 그야말로 켜켜이 쌓여 있다는 걸요. 그러니까 미야자키는 그냥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살아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런 창작자에게 ChatGPT의 이미지 생성 기술은 한 창작자의 삶 전체를 한순간에 납작하게 짓이겨버린 것일 수 있어요. 그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말이죠.
이런 상황을 이해해 가면서 과거 글로벌 상업음악 시장에서 불거졌던 샘플링 논란을 떠올렸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프랑스 음악 그룹 ‘딥 포레스트’(Deep Forest)의 노래 ‘Sweet Lullaby’죠(2). 딥 포레스트는 이 노래에서 솔로몬 제도에 거주하는 베이구(Baegu) 부족의 여성 아푸나크와(Afunakwa)가 전통 자장가 ‘Rorogwela’를 부른 목소리를 샘플링합니다. 이 노래를 녹음해서 LP로 발매한 건 민족음악학자 휴고 젬프(Hugo Zemp)였어요. 유네스코의 ‘Musical Sources’ 컬렉션의 일부로 포함된 곡이었지요. 딥 포레스트는 ‘Sweet Lullaby’에서 아푸나크와의 목소리 샘플을 주요 보컬 요소로 사용했고, 이 곡이 수록된 음반(1992)은 발매 후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히트를 쳤습니다.
(2) 관련 내용은 음악인류학자 Steven Feld의 유명한 논문 “A Sweet Lullaby for ‘World Music’”(Public Culture, 2000, 145-171)에 담겼습니다. 여기를 눌러 논문 전문을 살펴볼 수 있어요.
문제는 딥 포레스트가 원본을 무단 사용하고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어요. 딥 포레스트는 녹음 당사자인 휴고 젬프와 유네스코의 허가 없이 음원을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샘플링된 목소리의 주인인 아푸나크와 역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어요.
ChatGPT의 이미지 생성 기술이 논란이 되는 것도 과거의 이 샘플링 사건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AI 창작 문제는 ’예술가가 기술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중심으로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ChatGPT가 예술가의 저작권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다루어지고도 있어요. 실제로 이번 ChatGPT의 지브리 풍 이미지 생성 논란은 AI 창작 저작권법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죠.
그렇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노가 정말로 예술가의 생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다면, 이 논의는 이제 기술이나 법적 제도 차원 너머를 고민해야 합니다. 딥 포레스트의 무단 샘플링 논란 또한 AI 예술, 혹은 창작에 관한 논의가 기술이나 저작권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어요. 당시 딥 포레스트의 샘플링이 문제가 되었던 건 그저 원본을 무단 사용하고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거든요. 딥 포레스트는 앨범 재킷에 샘플의 출처를 ‘아프리카 피그미족’이라고 잘못 표기해 베이구 부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아프리카라는 넓은 범주로 뭉뜽그렸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게다가 부족의 전통 자장가라는 문화적 유산을 상업적으로 전유해, 이를 원래 의미와 맥락을 제거한 채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로만 사용했다는 것 역시 문제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딥 포레스트의 샘플링 논란은 단순히 저작권 침해라는 법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이구 부족의 전통 자장가가 놓인 존재론적, 문화적 배경을 깨끗이 지워 탈맥락화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과거 샘플링 논란을 살피자면, ChatGPT의 생성 이미지 기술과 예술에 관한 논의가 이제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나아가 AI 시대의 예술 향유 윤리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윤리가 ‘나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면, 그래서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윤리적 태도란 그저 ‘해도 된다, 해서는 안 된다’ 같은 판단에 관한 게 아닐 겁니다.AI 창작 시대 우리는 속도와 효율이 무언가 은폐하지는 않는지, 예술이 무엇인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는 없는지,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방식은 올바른지 같은 물음들을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 질문들은 예술과 기술,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우리를 향한 존중과 사랑에서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태도는 사랑 없이 불가능해요. AI 창작과 그 향유 윤리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일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80호_VIEW 2025.04.17.
글 에디터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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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영 계희승 강지영 권현석 김경화 정이은
에디터S 박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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