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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청취, 공존을 감각하는 방식

by 씨샵레터


글 ∙ 김경화

전임연구원





들리지 않는 것을 듣기 시작할 때

image (1).png 이미지 출처: Adobe

우리는 언제부터 소리를 ‘소비’하게 되었을까요? 이어폰을 착용해 음악을 ‘선택’하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소음’이라 이름 붙이며, 공간의 침묵마저 개인화된 콘텐츠로 대체하는 지금, 청각은 점점 더 ‘관리 가능한 감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은 듣지 않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이런 순간을 떠올려 보신 적 있으신가요?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공사장 소음이 갑자기 멈추고, 그제야 근처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나 멀리서 울리는 새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말입니다. 혹은 회의실 안에서 사람들의 키보드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에어컨의 진동음을 무심히 지나치다가, 문득 누군가의 짧은 한숨이 공간의 공기를 바꾸는 걸 느껴본 적은 없으신가요? 이처럼 우리는 보통 배경음이라 여겨지는 소리들을 들으려 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그 배경이 사라지거나 강조되었을 때 비로소 그 소리들의 존재를 감각하게 됩니다. 청취는 소리 자체보다 그 맥락이 무너질 때 그 존재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감각 경험입니다.


이렇게 청취는 점점 더 선택과 차단, 집중과 배제로 이루어진 행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제된 ‘배경’ 속에는 나와 다른 존재들이 흘려보내는 말소리, 숨소리, 한숨, 몸짓이 만드는 미묘한 소리들, 그리고 동물이나 사물, 바람, 기계음처럼 비인간 존재들이 내는 다양한 울림까지도 함께 얽혀 있습니다. 창밖의 바람 소리, 냉장고의 진동음, 휴대폰을 두드리는 손끝의 리듬. 그저 배경처럼 느껴지는 이 작은 소리들이, 사실은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미세하지만 강력한 증거일지 모릅니다.




공존의 감각, 청취의 존재론

철학자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은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을 낭만화하거나 이상화하기 보다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우리가 이미 복잡한 존재적 얽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유 방식을 제안합니다. 자연은 더 이상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평화로운 대상이 아니라, 숨소리처럼 가까이서 얽히고 부딪히며 영향을 주고받는 낯설면서도 친밀한 동반자라는 겁니다. 생태적 청취(ecological listening)는 이러한 모튼의 사유에서 출발해, 낯설고 필연적인 공존을 감각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듣기’는 단순히 소리를 인식하는 감각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듣고, 또 무엇을 듣지 않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다 보면, ‘나’라는 존재도 들리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니까요.

image (2).png 이미지 출처: Anthony Smith

이와 관련해 철학에서는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형성된다는 생각이죠. ‘나’라는 존재도 누구와 혹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고, 무엇에 반응하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정체성, 감정, 감각조차도 관계의 결 안에서 흘러가고 변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청취란, 단지 소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아니라, 소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의 방식,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내가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지를 돌아보는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사물, 환경, 기술 같은 사람 아닌 것들과도 얽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정수기의 물 흐름,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바람, 아파트 벽 너머 들려오는 이웃집 소음, 매캐한 공기 속에서 반복되는 오토바이 모터음. 그런 소리들은 말없이도 우리를 감싸고, 때로는 몸을 흔들며 통과하면서 우리가 세계 속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혹은 거칠게 들려줍니다.




소리로 엮이는 존재들

이런 생각은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나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이론들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설명되는 체계가 아니라, 사람, 사물, 소리, 기술, 환경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자로 구성된 그물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반응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image (3).png 이미지 출처: flickr

예컨대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 전철역 안내 방송의 리듬, 거리의 도로 공사음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소리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자이자 존재자의 일부로 작용합니다. 그 소리들이 없다면 공간의 분위기도, 우리의 감정이나 정체성도 전혀 다르게 구성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듣는’ 행위는 단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들과 순간순간 관계를 맺고 반응하는 일이며, 때로는 우리가 누구인지 감각적으로 다시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소리는 단지 외부 세계를 설명하는 신호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을 형성하는 데 깊이 관여하는 매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감각은 특히 자연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깊은 숲이나 바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 바람과 물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반복적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소리, 혹은 발밑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돌멩이의 굴러가는 소리 같은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이 단지 배경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정서, 심지어는 존재의 리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인 존재자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이때의 청취는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 몸을 열고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방식이 됩니다.




울리는 존재자로서 듣기

이러한 감각의 전환은 앞서 말한 모튼의 ‘어두운 생태’ 개념과도 맥락을 공유합니다. 생태적 청취는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얽혀 있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방식으로 울리고 있는지를 감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선택해서 듣는 주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들리고 있는 존재자라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이 전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생태적 청취는 바로 이 그물망을 능동적으로 감각하고 다시 상상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세계 속에서 누구와 혹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고 있는지를 다시 느껴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생태적 청취는 새로운 실천이라기보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바쁜 하루의 틈 사이, 익숙한 소리들 사이에서, 한 번쯤 그 배경의 울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것. 그 작은 청취의 순간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그저 듣는 자가 아니라, 함께 울리고 있는 존재자라는 사실을 다시 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울림 속에서, 우리는 다시 존재하고, 연결되고, 살아갑니다.







80호_VIEW 2025.04.17.

글 김경화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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