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가 주장한 것처럼 음악이 본질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l’ineffable)’ 영역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음악에 관한 글은 객관적 논증이 아닌 주관적 감상의 파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로 음악을 붙잡고, 읽고, 쓰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음악이라는 ‘현상’을 사랑하기 때문일 수도, 롤런드 앨런의 말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쓰는 인간』(2025)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어려운 길을 가려는 이들, 구체적으로 음악평론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작은 안내서입니다.
참고로 저는 작곡과 이론을 전공한 음악학자입니다. 주로 음악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에 스스로를 보편적인 의미의 ‘평론가’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평이 저의 전문 분야도 아닙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비평을 겸하는 음악학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악학자 정경영 한양대학교 교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대중 교양서를 가장한 그의 ‘학술서’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2021)는 음악학자가 음악을 사유하는 과정과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입니다. 대상을 해외로 넓히면 3년 전 타계한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 1945–2022) UC버클리 명예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음악학자로서 그 누구보다 활발히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매체에 날카롭고 방대한 비평을 꾸준히 기고했습니다. 그의 비평을 모은 Text and Act (1994), The Danger of Music (2008), Cursed Questions (2020) 같은 책들은 음악(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아는 한 20세기 이후 타루스킨보다 더 많은 비평을 쏟아낸 음악학자는 없습니다. 짐작건대 그 원동력은 음악에 관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음악학자의 역할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그의 비평은 단순히 연주가 좋고 나쁨을 넘어 우리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여기서 ‘음악에 관한 통념’이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 오랜 믿음이나 전통을 의미합니다.
가령 ‘음악은 언제부터 예술 혹은 작품이 되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바흐의 칸타타는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순수 ‘예술’, ‘작품’이 아니라 교회에 모인 신자들의 예배를 위한 ‘기능 음악’이었습니다. 경건한 침묵 속에서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는 현대의 콘서트홀 풍경과 설교의 일부로 음악을 듣고 기도와 묵상으로 나아갔던 당시의 맥락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역사적 단절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흐 음악의 본질 일부를 놓치고 있는 셈입니다.
음악에 관한 통념을 이야기할 때 베토벤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E. M. 포스터의 소설 『하워즈 엔드』(1910)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1)
(1) E. M. 포스터. 『하워즈 엔드』 고정아 옮김. (열린책들, 2010)
인간의 귀를 뚫고 들어간 소음들 가운데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이 가장 숭고하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도, 또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도 그 음악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E. M. 포스터, 『하워즈 엔드』 P. 45-46
지금도 이 문장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가 제안했던 ‘숭고(sublime)’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포와 경외감을 동반하는 압도적인 경험에 가깝습니다. 이 본래 의미를 되살려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다시 경험할 때 우리는 그저 ‘웅장하다’는 감상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소리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처절한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타루스킨의 비평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이 가운데 일부는 매우 도발적으로 들리기도 해서 학계 안팎으로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학자의 평론이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보편적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위치를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음악학자의 본질적인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진행하는 2025 KNSO 아카데미 평론 과정에서 음악 평론가를 꿈꾸는 수강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빛나는 눈앞에서 제가 가진 고민과 생각을 나누며 비단 음악학자뿐만 아니라 음악학을 공부하는 더 많은 학생들이 평론에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이 글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강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가이드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뻔한 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그런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글을 쓸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 번쯤 되새길 만한 내용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논(論)하지 않는 평(評)은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동적인 연주였다” 혹은 “지루했다”와 같은 표현은 비평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비평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대로 논하려면 왜 감동적이었는지, 무엇이 지루함을 유발했는지 구체적인 음악적 현상과 연결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가령 “피아니스트의 섬세한 터치가 돋보였다”라고 쓰는 대신 “피아니스트는 페달 사용을 최소화하고 극도로 절제된 다이내믹을 구사하여, 마치 독백과도 같은 내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라고 쓴다면 최소한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평론은 주관적 느낌의 고백이 아니라 그 느낌의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논증의 과정입니다. 제대로 논하려면 일단 들어야 하고, 잘 들으려면 뭘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음악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이론적 맥락 속에서 작품과 연주를 조망하고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비평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교향곡’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진지한 감상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1785년 런던의 복스홀(Vauxhall) 음악회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연주대에서 연주가 한창이지만 청중 대부분 잡담을 나누거나 다른 볼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실제로 교향곡은 사교 모임의 배경음악, 즉 여흥음악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세 편(39~41번)은 위촉 없이 작곡가 스스로의 의지로 썼습니다. 그게 뭐? 작곡가가 예술혼을 불태우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런 정신 나간 작곡가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차르트의 사례는 교향곡이 작곡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예고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면 우리의 감상은 단순한 소리의 향유를 넘어 과거와의 지적인 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좋은 비평은 넓은 의미의 분석과 해석이라는 두 축을 전제합니다. 분석에 기반하지 않은 해석은 근거 없는 주장이 되고,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는 분석은 무의미한 데이터 나열에 그칩니다. 가령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소나타 형식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분석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곡가가 발전부 끝에 카덴차를 배치한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래서 어떤 극적인 긴장감이나 서사적 효과를 의도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해석입니다. 어떤 비평가는 이를 창조적 고뇌의 흔적으로, 다른 비평가는 의도된 형식 파괴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해석이 분석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음악회는 연주자가 무대에서 소리를 내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 하나의 복합적인 문화 현상입니다. 따라서 평론의 대상 역시 확장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왜 이 시점에 이 작곡가의 작품이 연주되는지, 함께 연주된 다른 곡들과의 프로그램 구성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특정 무대 배치가 음향과 시각적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스트리밍 시대에 맞춘 연주 단체의 온라인 콘텐츠 전략이 클래식 음악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음악을 구성하는 총체적인 경험이자 비평을 통해 논의되기를 기다리는 대상입니다.
저는 ‘취향 존중’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이 모든 비판적 사유를 차단하는 방패로 사용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일지라도 그것이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 좋은 요리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연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템포, 음정, 리듬의 정확성, 악기 간의 밸런스, 악보에 대한 충실도 등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영역입니다. 이 요소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표현하여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가는 해석의 영역이며,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의미 있는 취향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연주자가 악보에 있는 음을 온전히 연주하지 못할 정도로 템포가 느리거나 빠르다면 그건 ‘적절한’ 템포가 아닙니다. 이건 주관의 영역도, 취향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좋지 않은 연주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조차 무시한 연주를 두고 ‘독창적 해석’이나 ‘취향’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한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잘 된 연주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린 혹평이 실은 나의 무지나 편견 때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어야 합니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미권에는 박사 학위의 의미에 관한 오래된 농담이 있습니다.
학사: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안다.
석사: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박사: 나만 모르는 게 아니었구나.
앎이 깊어질수록 내가 모르는 세계가 얼마나 광활한지 깨닫게 됩니다. 연주가 썩 만족스럽지 않은데, 가끔 그게 듣는 내 잘못인지, 아니면 연주자 잘못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2) 심지어 둘 다 아니고 공연장 문제일 때도 있고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심지어 저녁을 못 먹고 간 탓일 수도 있습니다. 설령 내가 제대로 잘 들었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최대한 연주자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계희승, “길들여진 귀를 위한 변명,” 『이데일리』, 2025년 7월 1일.
멋 부리고 싶은 그 마음, 너무나 잘 압니다. 일단 쓰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인데, 기왕이면 멋있게 하고 싶지요. 하지만 내실 없이 화려한 미사여구나 난해한 전문용어로 채워진 글은 글쓴이의 불안감을 드러낼 뿐입니다. 의외로 간단합니다. 어렵고 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다면 이미 고수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알고 쓰는 건지,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공허한 형용사 대신 그 느낌을 만들어낸 구체적인 연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묘사해 보세요. 멋은 그다음에 부려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전부 잊고 일단 쓰세요. 제발 쓰세요. 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생각은 파편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을 연결하고 논리를 부여하며 비로소 완성된 형태로 다듬어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생각을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각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완벽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첫 문장을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일단 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글이 발표되는 순간 그 글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음악에 대한 공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됩니다. 그게 비평입니다. 쓰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그래도 설득이 안 된다면 제임스 설터의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2020)을 보세요. 당장 쓰지 않고는 잠이 안 올 겁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저는 글쓰기의 ‘감각’은 일정 부분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취향’도 마찬가지. 노력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연습, 다른 하나는 ‘경험’입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서 좋은 비평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운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평을 위한 읽기는 수동적인 소비가 아니라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논리의 흐름을 따져보며 표현의 효과를 곱씹는 능동적인 해부 과정에 가깝습니다. 좋은 글은 어디서 읽을 수 있냐고요? 씨샵레터 구독자라면 이미 읽고 계십니다.
얼마 전 서평가 김성신의 『서평가 되는 법』(2025)을 읽었습니다(3).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평가 이원석의 『서평 쓰는 법』(2016)의 개정판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뻔했는데, 운 좋게 집어 들었습니다. 공감 가는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꼭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3) 김성신. 『서평가 되는 법』 (유유, 2025)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서평가가 가급적 많아지기를 바라지만 서평가로서 자격 미달인 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길 바라진 않는다. 전문 서평가가 되고 싶다면 이 점 하나만은 명심하자. 좋은 글은 좋은 ‘표현’이기보다는 좋은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서평 역시 현란한 수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책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 공공성에 대한 엄격한 자기 검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서평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공공성이다.
김성신, 『서평가 되는 법』 P. 18
물론 이는 서평가 김성신이 생각하는 서평의 본질입니다. 저에게는 음악 비평을 해야 하는 저만의 이유, 요컨대 이 오래된 서양 음악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음악에 관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미를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비평입니다. 음악평론을 꿈꾸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 각자 비평을 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찾게 되길 바랍니다.
86호_VIEW 2025.07.17.
글 계희승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공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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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S 박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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