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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샵레터 Jul 28. 2023

교토로 떠난 사운드 트립

43호 VIEW


                                           글 ∙ 소록

                                                    에디터



마이 리얼 트립, 여행기의 시작  

인천→오사카 비행기 창밖 하늘

가까운 곳으로 잠시 떠나고자 오사카행 비행기 티켓 한 장을 무작정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은 이른 여름휴가(?) 아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강제 휴식을 위해 날짜만 정해두었을 뿐 출발 직전까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로 공항을 향했어요. 도심에서 지내며 스멀스멀 차오르던 번잡함을 훌훌 털어버릴 각오라거나, 즐겁게 놀고 싶은 의욕이라거나, 먹을거리를 다 해치우겠다는 식욕도 없이, 급하게 시작된 저의 여행은 요즘 소위 말하는 MBTI의 ‘P’ 중에서도 ‘극 P’의 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목적 없이 떠난 3박 4일간의 여행(旅行)은 제게 “사운드 트립”이었더라구요. 이번 VIEW에는 조금은 개인적일 수 있는 저의 일본 여행기를 담아보았습니다. 나그네처럼 충분히 떠돌고 거닐며, 듣고 느낀 시간 뒤의 소리의 기록을 말이에요. 그럼, 3박 4일간의 오사카&교토행 사운드 트립, 지금 시작합니다!





사운드 워크? 사운드 트립!  


에디터의 음성녹음함

돌아온 후 여행을 되짚어 보니, 곳곳의 흔적이 소리의 기록으로 가득 남겨져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순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려 카메라를 꺼내듯, 저는 머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을 때면 녹음기를 켜는 버릇이 있어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깔끔함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 그대로의 소리, 때로는 시끄럽게 느껴지는 소음이 들어가기도 하지만요. 녹음을 위한 시간은 저도 모르게 그 시공간을 천천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찰칵’하고 순간의 장면을 포착했다는 희열과는 달리 조금은 지루하고 길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녹음을 위해 소모하는 물리적인 시간은 겹겹이 쌓여있는 존재들을 하나씩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의식적으로 소리를 듣기 위해 사운드워크를 떠나는 것과는 다르지만, 내가 있는 세계를 소리로 오롯이 감각하는, 일종의 ‘사운드 트립’이 아닐까요? 녹음기를 켜고 주변의 소리를 집중해서 듣는다는 것만으로 공간과 분위기, 날씨와 냄새, 때로는 과거의 향수까지 강하게 느껴집니다. 흩어진 소리의 조각들을 맞춰보며 제가 걸었던 거리와 지나쳐 간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것만으로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익숙한듯 낯선      

신오사카역을 향하는 JR 지하철

공항 철도를 타고 처음 도착한 오사카의 지하철 역사는 혼잡함 그 자체였어요. 혼잡하기로는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서울에서는 늘 헤드폰을 끼고 있던 터라 밀집 지역은 늘 귀를 막아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다음 행선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타지에서의 긴장감 때문인지 시끄러운 소음에도 불구하고 헤드폰을 낄 겨를도 없었어요. 소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배낭을 멘 채 정신 없이 다음 장소를 향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한 혼란 속, 문득 제가 알던 익숙한 도심의 소리가 겹겹이 들려왔어요. 여행객으로 마주한 대도시의 활기는 퇴근하는 사람들과 도심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지나는 소리, 환승하려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삐빅’ 개찰구에 카드를 태그하는 소리를 비롯한 사람들의 바쁜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생경한 도시의 익숙한 소리 풍경이랄까요? 그러다 갑자기, 어디선가 작은 구호 소리가 들렸어요. 무의식중에 그 새로운 소리를 따라가보니, 헌혈 캠페인을 하는 사람들이 역 사이 사이에 모여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말은 분명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음에도, 낯선 곳에서 들리는 그 외침은 친숙하게 느껴졌어요. 나긋한듯,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울리는 헌혈 캠페인 앞에 멀뚱히 서 있다 저도 모르게 녹음기를 켜고 그 소리를 기록해 보았습니다.





1000년의 시간이 압축된 소리

천 년이라는 오랜 역사가 압축된 공간에선 지금 어떤 소리가 들릴까요? 그 시간은 제 상상과는 다른 소리 경험으로 남았어요. 일본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교토의 기온 마츠리를 방문했습니다. 기온 마츠리는 야사카 신사에서 개최하는 7월 내내 열리는 교토 최대의 축제에요. 869년 전염병이 돌자 신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이 축제는 천 년도 넘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어요. 전통에 따라 매년 소년 한 명이 신을 찾아갈 전령으로 선택됩니다. 7월 13일부터 첫 번째 행진이 끝나는 7월 17일까지, 이 소년은 여러 아름다운 축제용 수레 중 하나에 올라탑니다. 그리고는 절대 발이 지면에 닿지 않도록 해야 하죠.  

교토 기온 마츠리, 야사카 신사

교토 숙소 앞 밤 거리                                                        교토 기온 마츠리, ©교토시 공식 여행 가이드


커다란 신사 안으로 들어서자, 관광객들과 축제를 즐기는 인파가 몰려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어요. 유카타를 차려입은 현지 사람들부터 타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의 혼재된 언어, 신사의 종소리와 노랫소리, 발걸음 소리가 합쳐지며 현시대의 관광지만이 낼 수 있는 풍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낯선 언어와 사람들 사이에 속해 있는 느낌이 좋았어요. 마치 이세계(異世界) 속에 홀로 떨궈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요? 밤의 고요한 교토 거리와는 사뭇 다르게 말이에요. 천 년 전 신사에선 외지인들로 가득한 풍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걷고 또 걷고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며 상상해 봤어요. 천 년 전 이곳의 풍경을 말이에요. 그때 이곳에선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요?





회전초밥 집의 <최애의 아이>

우연히 들어선 식당에선 자취방에서 자주 듣던 애니메이션 오프닝 음악이 흘러나오기도 했어요. 최근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서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를 아시나요? 이 작품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별 기대 없이 첫 화를 틀었다가 시즌 1 전체를 본 것에 모자라, 지금은 후속 시리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특히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데에는 오프닝 음악이 큰 몫을 했는데요. 중독성 가득한 요아소비의 “IDOL”을 저 역시 한동안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회전 초밥을 먹던 중 갑자기 식당에서 이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일본 현지에서 초밥을 먹다 이 노래를 들으니 갑작스레 흥분되는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한국의 경우로 말하자면, 식당에서 멜론 인기차트를 틀어둔 것과 다름없는 일이겠지만, 현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듣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신선했어요. 잠시 젓가락을 내려두고 그 설렘의 감각을 꾸욱 누려봤답니다.

요아소비 - IDOL



오사카 할머니가 주신 사탕 한 묶음      

오사카에서 만난 할머니가 주신 사탕 껍질

오사카에서 만난 할머니와 나눈 짧은 대화도 이번 여행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오사카 시내를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한 일본 할머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거든요. 짧은 일본어와 짧은 한국어로 손짓발짓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상상이 되시나요? 얼마 안 가 버스가 도착하면서 대화는 길지 않게 끝이 났지만요. 버스를 타고 나서는 각자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되어 이대로 작별이려니 생각하던 중 할머니께서는 제 손에 급히 사탕 몇 개를 쥐여주시고는 쿨(?)하게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미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끝나 버린 짧은 만남이지만 따뜻한 환대의 기쁨과 왠지 모를 애틋함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손녀처럼 바라봐 주시던 눈빛, 낯선 사람으로 타지에서 환대받고 있다는 감각, 통하지 않는 언어 속 몸짓과 목소리로 느껴지는 진심. 이런 소소한 온기는 이번 제 여행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 주었어요. 할머니와 나눈 대화의 여운을 기억하

고자 이동하던 버스에서 녹음기를 켰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귀국하는 날 오전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갓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을 봤습니다. 네, 무려 7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10년 만에 나온 지브리의 신작입니다. 개봉 직후 현지에서 작품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어요.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이던 수백 명의 관객의 고요한 소리를 기억합니다.


지브리만의 포근하고 따뜻한 정취, 모험과 성장 이야기, 그리고 거기 담긴 음악은 오랜 시간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까지 깊은 감동을 선사해 왔습니다. 여러 번 은퇴와 복귀를 번복해온 하야오 감독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복귀를 절실히 기다려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죠. 게다가 이번 작품이 포스터 한 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기대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변화된 수많은 매체의 자극들로 가득한 현시대에, 거창한 기술이나 홍보 하나 없이 공개된 포스터 한 장은 이 시대에 진심이 통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일 것입니다. 영화 시작 전부터 이미 그 감동은 시작되고 있었어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메인 포스터 © 스튜디오 지브리                                                  오사카 난카이난바 토호 시네마


영화가 끝난 뒤,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10분가량의 오랜 시간 동안 영화관의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좌석을 지키며 조용히 영화의 마지막을 음미했어요. 크레딧 위로 올라가던 모든 제작 인원의 이름을 지켜봐 주는 것 같았어요. 긴 고요함 속에 아마 마지막 작품일지 모르는 하야오 감독을 향한 존경과 수많은 사람의 오랜 노고를 존중해 주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그 고요한 공기가 귀국 전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제겐 그 십여 분의 정적이 평생 잊지 못할 한 순간으로 남을 것 같아요.





다시, 여행을 꿈꾸는 이유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P. 51


오사카 도심, 우메다 거리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다시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 여행기에서 본능적으로 기록한 것들이 저에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의미를 찾기 위한 행동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는 무언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귀국 후 여느 때와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여행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금 상기해 봅니다. “PAUSE AND LISTEN.” 잠시 멈춰 귀를 기울이면, 때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려오는 순간을 만나게 돼요. 정신없는 일상 속 늘 헤드폰 속 깊이 잠겨 있던 귀를 열어, 소음으로 가득하던 일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오사카와 교토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작은 것부터 귀 기울여 듣기, 나의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기. 저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어요. 물론 얼마 안 가 다시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괜찮아요. 왠지 모르게 언젠가 또 새로운 곳을 향하는 표를 끊는 제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거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하나의 좌표가 될 거라 생각해요. 오늘 여러분들의 일상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있나요?




► 이 글에 실린 사진은 에디터가 직접 기록한 것입니다.








43호_VIEW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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