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작은 동양 아이 (1)
지금의 나란 사람을 조금 이해하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2년 봄, 우리 가족은 유학길을 나선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바다 건너 미국 서부로 이사를 간다.
두려움보단 설렘이 무척 컸다. 아마 부모님이 내가 미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노력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떠나기 전 공부했던 알록달록 알파벳 교구도 신기했고, 도착 후 보게 된 우리 가족의 첫 미국 집도 꽤 맘에 들었다. 내가 다닐 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던 집이었는데, 한 건물에 위, 아래 두 가구 살게끔 설계한 곳이었다. 집의 외벽은 연노랑이었고,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카펫도 깔려있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지나 나는 집 앞 길을 건너 유치원을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어린 나이에 스스로 한글을 터득했던 나에게 타지에서도 잘하리라 내심 부모님이 기대를 많이 하셨을 터. 하지만 유치원 첫날 말 한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내 이름을 소개해달라는 말도 못 알아듣고 침묵 속에 앉아있다가 집에 와서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 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날 어머니가 거실에서 청소기 돌릴 때 나는 테이블 위 종이에 내 이름을 계속 쓰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가서 유치원 선생님이 나눠준 종이 위에 내 이름을 꾹 꾹 눌러 적었다.
아이들의 머리는 스펀지 같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내 머리도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기 작성이 의무였는데, 2학년 올라가서는 선생님이 내 일기장을 다른 아이들에게 예시로 보여줄 만큼 글 쓰는 실력도 다행히 늘게 되었다. 학년에서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소소한 상장도 받아오고 학교에서의 생활은 무탈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우리 가족이 마냥 행복하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20대에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사 온 우리 부모님은 다툼이 잦았고, 내 어린 동생과 나는 그 갈등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그때까지 자상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으며, 우리 관계는 그 이후로 월등히 좋았던 적이 없을 만큼 마치 먹물을 종이에 한 방울 씩 떨어트리는 것 마냥 가족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게, 나도 20대에 똑같이 하라고 했으면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그 당시 받았을 법한 스트레스와 압박을 상상해보면 그분들도 사람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두 번째 살았던 곳은 단지 중간에 큰 정글 같은 마당이 있어서 동생이나 아파트 단지 내 친구들과 거의 매일 밖에서 뛰어놀았다. 잔디마당에서 스스로 자전거 타는 방법도 배우고, 땅에 떨어진 나무 열매 갖고 놀고. 저학년 초등학생에겐 걱정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아버지 유학 시절 초반에는 근방에 아버지 친구 가족도 여럿 살아서 주말마다 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자녀도 우리 자매 또래였기에 다 함께 놀고 소소한 사고도 치곤 했다. 별건 아니고 전신 거울이 달려있는 옷장 문 앞에서 점프놀이를 하다가 혀를 심하게 깨물어 입에서 피가 철철 나기도 했다. 어느 날 가족들끼리 교외로 놀러 나갔는데 거기 나뭇가지에 매달려 놀다가 땅에 떨어져 잠시 혼절한 적도.
엄마와 같이 과학 숙제를 해서 결과물을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전시했던 기억. 동네 공원에 가서 그곳 호수에 살던 백조와 오리들에게 빵조각 던져준 기억. 가족 다 같이 디즈니랜드 가서 카우보이 공연을 본 기억. 하나하나의 추억들이 이어져 우리 가족의 미국 생활은 순조롭게, 때론 풍요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곳에 조금 익숙해져 갈 때 즈음,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사를 가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북동부에 있는 오하이오라는 곳으로. 나는 그때 몰랐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나를 평생 힘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