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문학이 친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내게 문학은 '별로 안 친한 같은 반 친구' 같은 존재였다. 같은 반이어도 안 친한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이름이랑 얼굴은 안다. 항상 가까이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걔한테 별로 관심은 없다. 관심이 없으니 먼저 다가가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면 잠깐 머릿속에 머무르긴 해도 금세 사라진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다니는 내내 문학을 배웠다. 늘 가까이에 있었지만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을 읽긴 읽어도 직접 찾아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거라서, 필독 도서라서, 시험에 출제된 거라서 읽었다. 그렇게 읽은 작품들은 쉽게 잊어버렸다. 문학은 내 관심 영역 안에 있지 않은 것이었다.
문학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내 생각과 감정을 짧으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에 관심이 갔다. 그때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시를 썼다. 학교에서 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시를 쓴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진심을 담아서 쓴 적은 없었다. 후련했다. 힘이 붙어서 몇 편을 더 썼다. 누구한테 보여주지는 않고 혼자 몰래 간직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작품도 생겼다. 그때 읽던 작품들은 모두 수능 연계 교재에 있던 것이었는데, 시는 한용운의 「사랑의 측량」이, 소설은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가 감동적이었다. 입시 공부를 하면서 한 번도 소설의 전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을 찾아서」는 직접 책을 사서 읽을 정도였다. 문학은 더 이상 내 관심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문학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입시 공부를 하면서 가장 흐릿하게 다가왔던 과목이 문학이었다. 문제를 풀면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주어진 표현의 미묘한 의미 차이를 파악하는 데 좀 둔했던 것 같다. 입시를 떠나서,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이 표현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작품 안팎의 요소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긴 하는데 그게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작품을 직접 쓸 때에도 내가 표현하려고 했던 게 잘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다. 작품을 읽는 능력, 감상을 표현하는 능력, 작품을 쓰는 능력 모두 부족한 것이다.
애초에 나는 문학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다루는 언어 예술이다. 문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주된 대상은 자신의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있어서 나는 그동안 내 감정을 억누르고 외면하려고 했다. 이름조차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감정도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좋다, 재밌다 정도일 뿐이었다. 감정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문학보다는 법도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내게 문학이 필요하다. 문학을 가까이할 때, 나의 감정을 존중하면서 좀 더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참고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갔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문학에 처음 이끌렸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감정은 무시한 채 이성만을 돌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느낀 일종의 갈증이었다. 사실 지금도 시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이론적인 글을 쓰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럼에도 서툴게나마 시를 써보고 하는 건 나의 감정을 돌보기 위해서다. 이제 나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