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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매화

by 인문학도 최수민

봄, 그야말로 ‘벚꽃의 계절’이다. 봄이 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얼른 벚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그래서인지 벚꽃은 뉴스에서 전국 지역별 개화 시기까지 안내해 준다. 벚꽃이 피면 사람들은 벚꽃 명소를 찾아다닌다. 전국 곳곳에서는 ‘진해 군항제’, ‘여의도 봄꽃축제’와 같은 벚꽃 축제들이 성대하게 열린다. 축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의 제목은 ‘벚꽃엔딩’이다. 벚꽃의 화려한 위상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 보니 벚꽃한테 가려져서 피해를 받은 꽃이 한둘이 아니다. 목련, 개나리, 산수유와 같은 여러 봄꽃들은 점점 소외되었다. 벚꽃을 제외하고서 저게 무슨 꽃이냐고 물었을 때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꽃이 몇이나 될까?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나도 사실 산수유 같은 꽃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러 봄꽃들이 이처럼 피해를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피해자는 바로 매화다.


매화는 오래전부터 ‘설중매’라고 해서 선비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눈과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에 가장 일찍 피어나는 그 모습이 지조와 절개를 보여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역사 속 인물들의 호를 보면 매화를 뜻하는 ‘매(梅)’ 자가 많이 들어간다. ‘매월당’ 김시습, ‘매천’ 황현, ‘매헌’ 윤봉길처럼 말이다. 퇴계 이황은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죽기 전에도 자신이 키우는 매화를 걱정했다고 한다. 매화는 매란국죽의 사군자 중 하나이기도 해서 시와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다.


지금은 어떨까?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이 학교 화단에 피어있는 매화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야, 저거 벚꽃 아니냐?” 실제로 흰 매화를 보면 벚꽃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둘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한때 큰 영광을 누렸던 매화로서는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자기가 피기는 벚꽃보다 빨리 피는데 벚꽃으로 오해를 받아야 하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눈 속에 핀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는 ‘매화음(梅花飮)’은 있었지만 벚꽃놀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벚꽃놀이가 대세다. 선비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운 매화는 이제 ‘벚꽃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좀 더 빨리 피는 꽃’ 따위가 되어 버렸다. ‘벚꽃엔딩’은 있지만 ‘매화엔딩’은 없다.


매화를 이렇게 억울하게 만든 건 정확히는 벚꽃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이다.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들이 고상한 매화보다는 화려한 벚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꽃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전반에서 고상한 것보다는 화려한 것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호화스러운 호텔, 세련된 옷, 고급스러운 차, 비싼 명품 가방을 누리길 원한다. SNS에 이런 것들을 누리는 모습을 공유한다. 남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양심, 성평등, 환경 보호, 평화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SNS에서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할지는 몰라도, 정말로 추구할 생각은 딱히 없다. 매화의 억울함은 이러한 세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벚꽃만 기억하고 고상한 매화는 잊어버렸다. 어쩌면 이러다가 우리 사회에는 벚꽃만 남고 매화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화를 기억해야 한다. 소중하고 바람직한 가치를 진실되게 추구해야 한다. SNS에 어떤 화려한 모습을 보여줄지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참에 봄을 맞아 가슴속에 저마다의 매화(매실나무)를 한 그루 심어보는 건 어떨까? 가슴속의 매화를 잘 가꾸어 나간다면, 눈은 벚꽃 덕에 즐겁고 가슴은 매화 덕에 깊어지는 그런 풍요로운 봄날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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