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문득문득 절대적으로 참인 무언가를 상상해 보게 된다. 시간, 공간, 인간을 초월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세계와 일치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철학에 진심인 사람들만 지니는 유별난 성향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적어도 신중한 사람들은 참인 명제들만 믿고 싶어 한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단지 조금 더 신중하고 끈질길 뿐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참을 염두에 두고 모든 명제들을 인사청문회 하듯이 탈탈 털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참인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얻은 바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모든 이론은 그 자체로 부실하다"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먼저 용어를 정의하고자 한다. 이론을 '세계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명제들의 정합적인 체계'라고 정의하자. '기술하다'를 '어떤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다'라고 정의하자. 대상을 '세계의 전체 또는 부분'이라고 정의하자. '설명하다'를 '어떤 현상을 그 이유가 되는 다른 현상과 연결하다'라고 정의하자. 명제를 '어떤 대상의 속성 또는 어떤 대상과 다른 대상의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 표현'이라고 정의하자. '정합적임'을 '모순이 없음'이라고 정의하자. 모순을 '참과 거짓을 동시에 포함함'이라고 정의하자. '참임'을 '어떤 명제가 세계와 일치함'이라고 정의하자. '거짓임'을 '참이 아님'이라고 정의하자. 당연해 보이지만 이를 정의하지 않으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어떤 속성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할 근거가 없다. 체계를 '의존 관계로 연결된 어떤 대상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자. 이론에 있어서 '부실함'을 '거짓인 경우가 있는 명제를 포함함'이라고 정의하자.
이제 왜 모든 이론이 그 자체로 부실한지 설명하고자 한다. 모든 이론은 절대적으로 참인, 적어도 보다 넓은 영역에서 참인 명제만을 포함하려고 한다. 일부러 거짓으로 여겨지는 명제를 포함하는 이론은 없을 것이다. 지식을 얻고자 하면서 일부러 거짓이라고 여기는 명제를 믿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거짓인 명제를 포함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부실하다. 따라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상당히 넓은 영역에서 참인 명제들로만 이루어진 이론이 있다고 하자. 만약 그 이론의 어떤 명제가 이후에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그 이론은 부실하다. 따라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절대 거짓일 수 없는, 절대적으로 참인 것으로 보이는 명제들로만 이루어진 이론이 있다고 하자. 그 이론의 명제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 명제에는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속성에 대한 언어 표현이 적어도 하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언어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이라는 언어 표현이 있다. '배드민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까지가 배드민턴이고, 어디부터가 배드민턴이 아닌가? 테니스 라켓으로 치는 배드민턴은 배드민턴인가? 규정을 벗어난 규격의 코트에서 치는 배드민턴은 배드민턴인가? 족구 코트에서 치는 배드민턴은 배드민턴인가? '숭례문'도 마찬가지다. 직접 숭례문 앞에 가서 숭례문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숭례문'의 의미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불에 탄 숭례문은 숭례문인가? 불에 타기 전의 숭례문은 숭례문인가? '숭례문'이 가리키는 대상이 계속 달라지는 것 아닌가? ('테세우스의 배'를 참고할 수 있다.) 이처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반복하면 언어 표현의 의미, 범위, 경계가 모호해진다. 아까 선택한 명제에 포함된 언어 표현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모호한 명제는 반드시 거짓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숭례문의 누각은 2층이다'라는 명제는 지금은 참이지만 화재 당시에는 거짓이다. 따라서 모든 이론은 거짓인 경우가 있는 명제를 반드시 포함하고, "모든 이론은 그 자체로 부실하다"라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학문은 이론에 의존하고, 이론은 학문에 의존한다. 이론은 학문을 움직이고, 학문은 이론을 만든다. 철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등 모든 학문이 그렇다. 심지어 우리가 신봉해 마지않는 수학, 자연과학까지 마찬가지다. '1'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은 존재하는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1이 존재한다면 왜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가? 숫자도 의미가 모호하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부실하다. 모든 이론적인 지식도 부실하다. 나아가 모든 이론적인 활동의 결과도 부실하다. 확실하고 엄밀한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땅이 푹푹 꺼져서 뭘 쌓아 올릴 수가 없다. 사상누각이다. 땅이 없으니 허공을 자유낙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를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없다. 수많은 주장과 근거가 난무할 뿐이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이 있을 뿐이다.
이론의 부실함은 언어의 모호함에서 비롯된다. 언어의 모호함은 게티어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식의 전통적 정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철학자 게티어가 제시한 유형의 사례들이다. 전통적으로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정의된다. 'JTB 분석'이라고 부른다. 즉 내가 어떤 명제를 안다고 하려면 그 명제를 믿고 있고, 그 명제가 참이어야 하며,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참이라고 믿은 것이어야 한다. 게티어 사례는 이 정의의 허점을 들춘다. 예를 들어, 나는 A와 같은 동아리다. 나는 A와 B가 같이 다니는 것을 자주 마주쳤다. 인스타를 통해 같이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노래방도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어느 날은 같은 집에 들어가는 것도 봤다. 따라서 나는 'B와 사귀는 사람은 나와 같은 동아리다'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A와 B는 남매였고, 진짜 B와 사귀는 사람은 나와 같은 동아리인 C였다. JTB 분석에 따르면 나의 믿음은 참이고 정당하기 때문에 지식이어야 하지만 이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혼란이 언어의 모호함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히 A를 염두에 두고 'B와 사귀는 사람은 나와 같은 동아리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된 이 명제는 나의 믿음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언어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왜곡이 생기는 것이다.
모든 이론적인 활동의 결과가 부실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확실하고 엄밀한 기초 또는 절대적인 참을 요구하는 나의 태도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계속 살고 싶어 하면서 '복어 독을 먹으면 건강해진다'라는 의심스러운 명제를 벌컥 믿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다. 참인 명제들만 믿고 싶어 하는 한, 자연스럽게 명제들의 거짓인 부분을 가능한 한 많이 들추어 내고 확실하고 엄밀한 기초 또는 절대적인 참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거짓인 명제를 믿을 수 없고, 참·거짓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명제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에는 한 가지 큰 결함이 있다. 바로 이 글을 쓰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나의 주장도 하나의 이론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나의 주장이 나의 주장을 공격한다. 나의 주장도 언어로 표현되어 버렸다. 의미가 모호하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미리 용어의 정의를 제시했지만 그 정의 또한 언어로 표현된다. 의미에 대해 반복해서 질문할 수 있다. '세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현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체'와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 표현을 언어 표현으로 정의하는 한 모호함을 해소할 수 없다. 언어 표현의 의미가 모호하면 반드시 그 표현이 포함된 명제가 거짓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주장도 하나의 이론으로서 그 자체로 부실하다.
자기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예시는 많다. 첫째, 포괄적 상대주의(global relativism)다. 모든 참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모든 참'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주장 자체의 참도 상대적이다. 이 주장이 거짓인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이 주장이 이 주장 자체를 공격한다. 둘째, 거짓말쟁이 역설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이 참이라고 가정하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참이다. 따라서 이 문장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가정과 모순이다.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가정하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거짓이다. 따라서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가정과 모순이다. 자기를 내세우면서, 동시에 자기가 '거짓이라고' 내세우기 때문이다. 셋째, 결정론이다. 세계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고, 모든 물질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자. 원인과 자연법칙 외에 어떤 요소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이전 세계의 상태와 자연법칙만 있으면 이후 세계의 상태가 결정된다. 연쇄적으로 이후 세계의 상태가 모두 결정된다. 세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의 마음(예: 믿음)도 몸의 상태(예: 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결정론을 벗어나려고 결정론을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변덕을 부려봤자 그 변덕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것이다. 따라서 결정론은 무의미해지고 그냥 하려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내가 주장하는 결정론의 세계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넷째, 미시세계에 대한 관측이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지니고, 두 성질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으며, 관측이 대상의 상태를 바꾼다. 관측 주체는 거시세계의 물체이고, 관측 대상은 미시세계의 물체이다. 전자가 이중 슬릿을 지날 때는 파동이다가 스크린에 부딪치는 순간, 즉 관측이 일어나는 순간 입자로 바뀐다. 관측이 관측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섯째, 철학이다. '철학을 해도 된다'라는 명제를 철학적인 방식으로 주장해도 되는가? 즉 철학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철학을 해도 된다'라는 명제를 '철학을 하면서' 주장해도 되는가? 마찬가지로 '철학을 하면 안 된다'라는 명제를 철학적인 방식으로 주장해도 되는가? '논증을 하면 안 된다'라는 명제를 논증해도 되는가? "질문해도 되는가?"라고 질문해도 되는가? 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게 가능이나 한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면 왜 부정적인가?
나의 주장도 이런 형태다.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주장을 진리처럼 제시한다. 모든 이론은 부실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이론에 나의 주장도 포함된다. 이 혼란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나의 주장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이런 형태의 공격, 자기모순, 역설을 해결하고 나의 주장을 수정, 유지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주장을 최대한 수정하면서 지키고자 한다. 아무리 봐도 나의 주장이 현실과 매우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명제들이 상대적으로 참인 것 같다. 나의 주장을 지키려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절대적인 참과 포괄적 상대주의다.
첫째, 절대적인 참이다. 참을 '세계와 일치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세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 세계의 전체를 경험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세계의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마다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겹치는 부분도 있고 겹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게다가 사람들마다 경험하는 세계조차도 내용이 계속 달라진다. 따라서 모든 참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따른 포괄적 상대주의의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참을 추구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명제의 참·거짓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면 그 명제가 참일 때만 믿으면 된다! 믿음을 계속 바꾸면 된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참이 달라지고 참인 명제들만 믿고 싶은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참을 추구하지 않고도 거짓인 명제를 믿지 않을 수 있다. 이로써 나는 절대적인 참을 버린다.
둘째, 포괄적 상대주의다. 나의 주장도 일종의 포괄적 상대주의다. 참에 있어서 '상대적이다'를 '상황에 따라 참·거짓이 다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참은 상대적이다'라는 명제를 '모든 명제는 참인 상황이 있고 거짓인 상황이 있다'라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명제 자체도 참인 상황이 있고 거짓인 상황이 있게 된다. 만약 어떤 상황이 '모든 명제는 참인 상황이 있고 거짓인 상황이 있다'라는 명제가 거짓인 상황이라면, 이 명제는 그 상황 하에서 거짓이 된다. 그 상황 하에서만 거짓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기모순은 아니다. 만약 어떤 상황이 이 명제가 참인 상황이라면, 이 명제는 그 상황 하에서 참이 된다. 다시 참 또는 거짓으로 가지를 칠 수 있다. 거짓인 경우 그 상황 하에서만 거짓인 것이고, 참인 경우 다시 가지를 칠 수 있다. 무한하게 가지를 칠 수 있다. '모든 참은 상대적이다'라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단정할 수 없게 된다. 자기모순이 해결된다. 마치 참과 거짓이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것 같다. 따라서 적어도 '모든 참은 상대적이다'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 현상이 '이 명제를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유로운 현실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상대주의, 특히 포괄적 상대주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윤리적 상대주의를 지적한다. 모든 윤리적 참도 상대적이라면 살인, 폭력 등 어떤 행위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포괄적 상대주의에 따라 모든 윤리적 참도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 자체로 옳은 행위 또는 그른 행위, 옳은 원칙 또는 그른 원칙 등은 없다. 그저 수많은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해도 된다고,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규정할 뿐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윤리학 이론, 법학 이론 등을 동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살인, 폭력 등 어떤 행위를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면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면 도저히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윤리를 어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하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한다. 이런 모습들이 뒤섞여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우리가 윤리적 주장을 펼치거나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윤리'를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언어다. 언어는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일반화, 추상화, 단순화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현실의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상대적인 현실의 차이들을 뭉개버린다. (추상은 반드시 사상을 낳는다.)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다. 앞서 살펴봤듯이 언어 표현의 의미, 범위, 경계가 모호해진다. 언어 표현으로 이루어진 명제들의 참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언어 표현을 사용해도 사람마다 염두에 두는 것이 다르고, 같은 언어 표현을 접해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다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이라는 표현이 있다.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고, '일가가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앞의 의미의 '남'이라면 가족한테 쓸 수 있다. 뒤의 의미의 '남'이라면 가족한테 쓸 수 없다. 이를 두고 가족끼리 다툴 수도 있다. 사람들이 쓰는 언어 표현이 완전히 같은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해도(예: 고유명사) 그 무언가가 분명하지 않다(예: 숭례문, 테세우스의 배). 언어 표현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해도 다른 언어 표현에 의존한다.
더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면, 언어적, 논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 사이에 어떤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이중성이다.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지닌다. 이를 물질의 이중성이라고 부른다. 포괄적 상대주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모든 참은 상대적이다'라는 명제의 참·거짓이 무한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든 명제도 잠재적으로 참과 거짓을 모두 지닐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어떤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명제가 동시에 참이고 거짓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행위가 그 결과에 영향을 준다. 물리학에 따르면, 거시세계의 주체의 관측이 미시세계의 대상의 상태를 바꾼다. 관측 자체가 관측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어떤 명제도 언어로 표현되기 전 마음속의 무언가로 있을 때는 참·거짓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가,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참 또는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즉,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가 언어 표현의 의미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물론 확실하게 두 현상 사이에 어떤 비슷한 점이 있다고 입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원자로 이루어진 인간이 원자를 탐구하고, 언어와 논리로 생각하는 인간이 언어와 논리를 탐구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언어의 기본적인 목적은 어떤 현상, 경험, 느낌을 주고받는 것이다. 언어는 이 목적의 간접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수단을 다른 수단으로 바꿔볼 수 있다. 왜 꼭 나의 마음을 언어로만 표현해야 하냐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예술이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을 통해 주관적인 현상, 경험, 느낌을 '직접'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기술의 한계도 있고 언어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도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의하는 것이다. 즉, '모든 언어 표현의 의미는 모호하다', '모든 참은 상대적이다', '모든 이론은 그 자체로 부실하다' 등의 명제들을 받아들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앞서 절대적인 참을 버렸듯이, 어떤 명제가 항상 참이거나 거짓이길 기대하지 말고 그 명제가 참일 때만 믿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떤 상황에서 그 명제가 참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무엇이 현실과 일치하는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나의 주장을 좀 더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모든 명제는 대체로 참이거나 대체로 거짓이다. 하지만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인 명제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모든 이론도 대체로 옳거나 대체로 그르다. 하지만 항상 옳거나 항상 그른 이론은 없다. 그래서 모든 이론이 그 자체로 부실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학, 자연과학 이론을 활용해 이미 수많은 편리한 기술들을 만들었다.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윤리학, 법학 이론을 활용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처벌을 정당화한다. 그 이론들이 옳은 경우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론들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의 주장도 대체로 옳다. 옳은 상황이 있고 그른 상황이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그 사람들의 상황에서는 나의 주장이 그른 이론일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주장과 근거가 난무한다. 나도 무엇이 참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를 (앞에서 여러 번 사용하기는 했지만) 현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현실을 의심하고(예: 데카르트) 부정할 수는 있어도 '거부'할 수는 없다. 현실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론적으로 뭘 어떻게 하든 현실은 '지 알아서' 굴러간다. 현실과 가장 가까운 것들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이 많다. 난장판이다. 그래서 일부러 눈 감은 채 믿고 '싶은' 것들을 근본적인 전제로 삼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거짓을 믿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철학이고, 철학에 답이 없다면, 모든 학문에도 답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주장들의 참·거짓을 끊임없이 스스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