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 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겐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 시험 성적 아신 건 아닐까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 소리
옆엔 신나게 코 골며 잠꼬대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 거 내 거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오 너무너무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 한 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 한스밴드, 「오락실」
1998년에 발매된 한스밴드의 1집 앨범 타이틀곡 '오락실'이다. 어렸을 때 들어봤는데, 도입부의 경쾌한 멜로디와 유쾌한 가사 때문에 기억하고 있던 노래다. 동시에 그 점 때문에 앞부분만 알고 뒷부분은 잘 알지 못했다. 앞부분만 대충 보고는 그냥 어떤 학생이 자신의 생활을 한탄하는, 그런 귀여운 내용으로 알았다. 어쩌다가 뒷부분까지 가사 전체를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 전체 가사를 봤을 때도 '오락실에서 아빠를 만나서 반가웠겠네. 둘 다 기분이 안 좋은 상황이네. 딸이 아빠를 위로하는 모습이 귀엽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문득 아빠가 오락실에 계속 간다는 게 이상했다.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 노래라는 점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놀랍게도 이 노래의 배경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1997년 외환위기 사건 자체는 복잡하다.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외국 돈이 모자라게 되어 기업과 금융기관이 외국에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된 사건으로 대충 이해하고 있다. 1997년, 1998년에 많은 대기업들이 부도가 났다. 대기업이 망하면서 협력하던 다른 기업과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도 망했다. IMF가 노동시장을 유연화한다면서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가 있으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게 했다. 그 결과로 1998년 당시 실업자 수만 15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자살률도 올랐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지하철역, 공원, 산으로 출근했다고 한다.
같은 노래 가사인데도 이런 맥락을 취해서 보니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멜로디가 너무 신나서 이런 배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특히 딸의 순수한 모습 때문에 아빠의 처지가 더 슬프게 와닿는다. 아빠의 입장에서 이 노래를 듣는다고 생각하니까 마지막에 강조해 놓은 부분에서 울컥했다. 당시 아빠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https://youtu.be/E8-dZq8o_So?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