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86,87,88,89,90번째
넉 달 전에 인천공항에서 노숙한다는 러시아인 청년 다섯 명 소식을 들었다. 푸틴의 징집령을 거부하고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온 이들.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라서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들 다섯 명은 난민 신청을 했는데 심사를 받지 못한 채 공항에서 지급한 머핀과 오렌지 주스만 매 끼니로 먹으면서 견디고 있었다. 지난주에 그중 두 명이 법무부에서 난민 심사 신청 자격을 얻게 됐다. 한국정부는 우크라이나전이 끝나면 재건에 힘쓰겠다고 962조 규모 대대적인 사업계획을 발표했는데,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청년 단 2명만이 이제 고작 난민 심사 신청 자격을 얻었다.
1월 말에 유엔사(유엔군사령부)에서 무인기로 남한의 영공 침범을 한 북한, 이에 맞대응한 한국의 무인기 이북 투입을 두고, 남북한 양쪽 모두 한국전쟁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발표했다. 긴장감이 높아지는 한반도. 냉전의 대리전을 치르고 휴전하고서 70년여간 종전협정을 맺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평화 속에서 지내는데, 여태까지 그랬으니(물론 실제로는 위기상황을 여러 번 넘겼지만) 별일 없을 거라 그냥 기대하며 산다.
우크라이나전을 일으킨 푸틴에게 그토록 분노한 한국인들이 푸틴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러시아인 청년들에게는 ‘머핀에 오렌지주스라도 주는 게 어디냐, 내 세금에 감사함도 모르니 니네 나라로 가라’는 반응이다. 일베만 그런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확인해보니 그렇지도 않다. 믿고 싶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일베 태동 13년째 일베의 혐오언어들은 퍼질 만큼 퍼져 있다. 혹시나 만에 하나 국지전이라도 전쟁이 나서, 내 아들 내 손자가 총 들기를 거절하고서 다른 나라 공항에서 가서 삼시 세끼 매 끼니 머핀에 오렌지주스만 먹으면서 난민 심사 신청 자격을 얻는 데에만 무려 넉 달이 걸려도 할 말이 없다. 전쟁이 장난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장난인가? 그때 가서 한탄해도 하는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한 인권, 복지, 민주주의 수준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언제나 배타적으로 구성된다. 국민이 아닌 자들은 그 혜택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민국가 내부 그 안에서는 그 혜택이 돌아가나? 국민 안에서도 그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무지 따지면서 피곤하게 산다. 겉으로만 인권, 인권 번지르르 늘어놓으면서, 승강기 27개만 서울지하철에 더 설치하면 될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두고, 서울시장은 시위하는 장애인 단체는 “약자가 아니다”라고 하고 장애인 단체에 거액의 배상소송을 걸었다.
너도 늙을 테고 나도 늙을 테고, 모두가 언젠가 늙는데. 장애인 단체의 요구로 전철에 승강기를 더 설치하면, 노인이나 아이, 또 신체적 질병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이들, 임산부, 혹은 건강하지만 때로 몸이 아플 때가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동권도 같이 확보되는 셈인데. 약자 때리기로 얻는 우월감에 기대어서, 누가 혜택을 보고 누가 혜택을 보지 않을지 정하는 힘 가진 자들의 비열한 사고 및 언어체계에 동의한다. 실제로 이런 체계에 의존해 자신의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많진 않겠지만, 그저 지켜보거나 내버려 두라고 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느 틈엔가 좀 무기력하고 처져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람은 꽤 되는 것 같다. 난감한 노릇이다. 그런 분위기에 때때로 나의 삶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무력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살면서 보니까 무력해져서 좋은 건 없었다. (무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 점 딱 하나 빼놓고서는)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제일 간단하니까..
그럼 세상이 더 아름다운 것 같잖아.
옛날에는 이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테아 로즈망(지음), 상드린 르벨(그림), 김모 (옮김), 2022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청소년상 수상작 아동성폭력 고발 그래픽노블 <침묵 공장> 중에서
2017년 5월 12일. 군위군에 있는 종돈사업장에서 이주민 두 명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이름은 ‘테즈 바하두르 구룽’, ‘차비 랄 차우다리’. 네팔에서 한국에 온 이들은 사망 시 나이가 25살, 24살이었다. 두 분은 한국인들이 먹는 우수한 돼지고기를 얻을 씨돼지(종돈)를 키우는 곳에서 일을 했다. 임신만 하는 암컷 돼지와 씨를 받는 수컷 돼지를 키우는 그곳 돼지똥통에 들어가서, 분뇨로 막힌 구멍을 뚫다가 유독가스(황화수소, 암모니아)에 질식해 사망했다. 사고가 나기 한달 전부터 기계가 고장 나서 수작업으로 돼지분뇨를 퍼내 왔었다. 테즈 바하두르 구룽 씨가 깊이 3미터의 집수조에서 양동이로 분뇨를 퍼올리면 밖에 있는 차비 랄 차우다리 씨가 양동이를 받아 올렸다.
사망 사고 전에 최소한의 보호장구조차 지급되지 않았고, 안전에 관한 교육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 사업주는 업무상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금고형 집행유예를 받았는데,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이주노동자 인권 활동가들의 지대한 노력으로 테즈 바하두르 구룽 씨와 차비 랄 차우다리 씨의 사망에 대한 산재보상이 정말 힘들게 이뤄졌다. 책 <돼지똥통에 빠져죽다 –이주노동자와 이주활동가가 들려주는 인권 이야기>(생명평화아시아엮음, 2022년)를 읽고서야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내 몸으로 들어와 내 피가 되고 내 살이 되어 내게 에너지를 공급했을지도 모를 그 고기살을 얻기 위해, 네팔의 두 젊은이들이 안전의 사각지대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주민 200만의 시대(2022년 한국 체류 외국인 217만 2천 여명). 2030년이면 이주배경이 있는 인구가 한국 인구의 5%에 달하게 된다. 다문화가구만 해도 벌써 38만 5천 가구(2021년 통계청)이다. 한국인 가정이 한국인을 낳으라는 저출산 타개책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에너지 소비가 많은 선진국 가운데 단 한 곳 어디에서도 낮은 출산율이 회복된 바가 없다. 노동력이 부족해서 이주민을 들어오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농업, 축산업, 건설업, 어업, 제조업 등 이미 한국의 산업 경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이주민인데,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국민국가의 배타적인 장벽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기존의 사고체계, 언어체계로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그간 제가 줍고 치운 강아지똥 사진들을 정리해서 몇 장을 골라 올려봅니다.
푸른 하늘
TV 저편에서
잔뜩 폼을 잡은 말 탄 군대가
인디언을 총으로 쏴서 쓰러트렸어.
반짝반짝 빛나는 총으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우울도
날려준다면 좋을 텐데
신에게 뇌물을 주고서
천국 가는 티켓 달라고 졸라대는 거
그거 진심이야?
눈꼽 만큼의 성실함조차 없으면서
웃고 있는 그런 녀석들이 있네
너희들 숨긴 그 손 한 번 좀 보여줘 봐.
태어난 곳이나 피부색, 눈동자색으로
나를,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야.
기사님 날 그 버스에 태워 줘요.
행선지 어디라도 좋아요
이렇게 될 일은 아닌데, 그렇잖아?
역사가 내게 묻고 있어
눈부실 정도로 푸른 하늘 바로 밑에서
푸른 하늘 바로 밑에서
푸른 하늘,
푸른 하늘
-블루 하츠 노래 '푸른 하늘' 중에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브런치를 시작할 때 제가 플로깅 기록으로 플로깅 100째까지 쓸 계획이었는데, 이제 플로깅 90번째 기록까지 왔네요. 앞으로 조금만 더 쓰고 브런치 기록을 마칠 예정입니다. 그간 아낌없이 응원보내주신 브런치 작가님들, 우연히 들어오셔서 넘치도록 기운을 북돋아주신 여러분들 모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