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언덕, 그리고 바다 #15

| 이스탄불 사진 여행기

by 유하리

포기
포기는 정신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 너무 본인에게 높은 기준을 세우면 점점 살기 어려워진다. 어렸을 땐 승부욕도 있고 욕심도 많았지만, 살다 보니 점점 경쟁사회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포기가 빠르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이번 여행은 계획을 세울 시간도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숙소에 도착해서 언니와 함께 일정을 조율하며 계획을 수정했다. 다음 숙소를 변경하려고 한국에서 예약했던 숙소를 확인하던 중, 결제 정보가 잘못되어 예약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틀 동안 카쉬에서 머물기로 일정을 바꿨는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카쉬에서 돌아오는 날, 모르는 결제 정보로 돈이 빠져나갔다. 확인해 보니, 예약이 취소되었다던 그 숙소의 결제였다. 부킹닷컴에 문의해 보니, 가예약 상태였기 때문에 노쇼(No-show)로 처리되었다고 했다. 터키 친구에게 호텔에 직접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호텔 측에서도 예약이 되어 있었다는 입장이었다.
돈이 너무 아까워 종일 자책하다가, 결국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마법처럼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왕좌왕하다 보면 잃는 것만 많아진다. 애매한 계획은 독이 될 수도 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처럼, 그냥 머릿속에서 지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다음 여정을 준비할 시간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먼저 생각해 본다.

YES → 해결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 최대한 문제를 해결한다.
NO → 깔끔하게 포기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요즘 가만히 있다간 점점 라인의 끝으로 밀려나 뒤처지고 만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중간 이상 가야 할까?


내가 서 있는 라인을 벗어나면 어떨까?
30년 넘게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뛰었을 때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막상 라인에서 벗어나 보니 미로 속을 헤매는 두려움보다는 무인도를 처음 개척하는 탐험가가 된 것 같은 호기심이 더 컸다.
이스탄불로 향하는 10시간의 비행 동안 한숨도 못 잤다. 비행기 좌석에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체질이지만, 이번 비행에서는 달랐다. 정해진 계획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해진 미래에서 처음 이탈한 학생의 일탈 같은 기분 때문이었을까?
결국, 내내 잠들지 못한 채 목도리를 뜨고 영화를 보며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