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사과의 방식

by 수빈

여름이 깊어질수록 카페를 찾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잦아졌고,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단지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가오는 기말고사 탓에 서로의 얼굴보다 책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유독 밝아 보이는 아이는 지우였다.


얼마 전, 지우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이름은 가은. 얼마 전 전학을 왔다고 한다. 어느 날, 목적 없이 동네를 걷던 가은을 지우가 우연히 마주쳤고, 동네를 안내해주며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했다. 그날 이후 둘은 함께 카페에 들러 공부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루틴이 생겼다. 오늘도 어깨를 맞대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아이의 모습은 단짝처럼 다정해 보였다.


“지우, 너 멜론소다 마실 거지? 멜론소다 하나랑 ‘그 여름의 자두’ 하나 주세요.”


가은은 주문을 하며 자두맛 아이스크림과 함께 카드를 내밀었다. 지우는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은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웃었다.


“고마워.”


결제가 끝나자, 가은은 능숙하게 카드를 챙기고 익숙한 손짓으로 지우를 데리고 늘 앉던 자리로 향했다. 가방을 열고 문제집을 꺼내며, 오늘 있었던 교실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소소한 해프닝, 선생님의 농담, 친구들의 반응까지. 지우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소리를 내어 웃는 일은 드물지만, 그 눈웃음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 보였다.


“음료 나왔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은은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을 빠르게 한 쪽으로 치웠다. 쟁반을 내려놓으며 지우를 향해 ‘맛있게 먹어’라는 인사를 건넸고, 지우는 쟁반 위의 음료보다 먼저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꾸밈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알던 지우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오늘도 지우는 가은과 함께였다. 지우는 늘 마시던 멜론소다, 가은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같은 자리에서 둘이 속닥속닥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 요즘 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여전히 더운 오후, 아이들은 시원한 음료를 찾았고, 주문을 마치고 각자 테이블에 널브러졌다. 마치 전쟁을 마친 군인들처럼. 하지만 지우는 가은과의 대화에 눈이 반짝반짝 즐거워보이는 게 티가 났다.

그 때 하린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왔다. 여전히 주변에는 친구들이 북적였다. 주문을 하고는 지우와 떨어진 자리로 앉았다. 오늘 사회 시간에 쪽지시험이 있었는지, 누가 점수를 잘 받았는지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어? 야, 정가은. 너도 와 있었네?”


하린 무리 중 한 명이 지우의 테이블로 성큼 다가가며 소리쳤다. 가은은 손에 쥔 빨대를 놓칠 듯 움찔했다. 얼굴에 잠깐 스치는 표정이 낯설었다.


“네가 준 정리본, 완전 대박이었어. 덕분에 9점이나 맞았다니까?”


아이의 밝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테이블 위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했다.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손가락으로 컵 뚜껑을 톡톡 건드렸다. 가은은 잠깐 시선을 주춤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거…. 어, 그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가은은 말을 최대한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가은의 그런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다가갔던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하린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하린이 잠깐 지우의 테이블을 보는 듯 했지만, 이내 시선이 거둬졌다. 소란이 정리된 뒤 가은은 불편해보였다. 지우의 눈치를 살피며 과장된 액션과 말이 횡설수설했다.


“그런데, 가은아.”

“어?”

“아까 수지가 얘기한 정리본, 그거 혹시 내가 너한테 준 거 얘기하는 거야?”


가은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너가 준 거랑은 좀 달라. 너 거 보고 나도 내 나름대로 정리했어.”


지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컵 속의 얼음이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지우는 손가락으로 빨대를 건드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게 네가 직접 다 정리한 건 아니잖아.”


가은의 웃음이 살짝 흐려졌다. 과장되던 말투는 사라지고, 시선이 테이블 위 어딘가에 걸려 머물렀다.


“바로 앞에 와서 보여달라고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냥 거절하기가 좀 그랬어. 수지 무리랑 어색하게 엮이고 싶지도 않았고.”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음을 빨대로 툭툭 치는 손끝만 가볍게 떨렸따.


“지우야, 혹시 화났어? 미안해. 다음엔 진짜 안 그럴게, 응? 화 풀어라. 너랑 나, 베프잖아.”


가은은 몸을 조금 기울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지우를 바라봤다. 지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는 그냥, 나한테 먼저 물어봐줘.”

“알겠어! 지우 너 화 푼거다?”


가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활짝 웃었다. 분위기는 조금씩 풀려갔고,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제집을 펼쳤다. 가은은 필통을 열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펜 하나를 꺼냈다. 살짝 무게감이 있는 바디에 금빛 장식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이거, 지우 너 줄게.”

“어? 왜?”


지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나는 이런 거 진짜 많거든. 너처럼 잘 써줄 친구가 가지는 게 더 의미 있지.”


지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펜을 다시 내밀었다.


“괜찮아. 나 펜 많아.”

“아니야. 진짜야. 네가 써준다면 나는 오히려 고마운 걸?”


가은은 지우의 손에 억지로 펜을 쥐어주었다. 지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고마워.’라고 말했지만, 그 펜을 바로 쓰진 않았다. 지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은은 지우의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히려 말을 쏟아냈다.


“지우야, 너 여름휴가 어디 가? 우리 엄마는 또 프랑스를 간대. 작년에 갔는데 너무 좋았다고 또 예약한거야. 사실 나는 다른 곳을 가고 싶었는데 말이지.”


가은의 목소리는 들뜬 듯 가벼웠지만,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은은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카페를 나섰다. 각자의 학원으로 향한 아이들도 하나둘 빠져나가고, 금세 카페 안은 고요해졌다. 지우는 오랜만에 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무언가 말을 건네볼까 고민했지만, 나는 지우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다. 빈 테이블을 행주로 닦고, 가득 쌓인 컵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지우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이가 쟁반을 들고 와 인사를 건네며 카페를 나섰다. 출입문이 조용히 닫히자, 마침내 지우가 입을 열었다.


“언니, 혹시 아까 가은이랑 나눈 이야기, 들으셨어요?”

“응. 너희가 가까이 있어서…. 다 들리더라.”


지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뒤따랐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지우는 어떤데?”


지우는 잠시 망설였다. 생각이 길지는 않았다.


“가은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근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요. 친구라면 이해해줘야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사과하는 태도가 좀…. 음, 진심이 안 느껴졌어요. 내가 화낼 틈도 없이 ‘네가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이러니까, 뭐랄까…. 그냥 넘어가달라는 느낌?”


지우 앞에 놓였던 컵 속 얼음은 어느새 다 녹아버려 있었다. 나는 그 컵을 조용히 치우고, 새로운 잔에 얼음을 담아 시원한 물을 건넸다.


“어릴 적부터 우리 엄마는 항상 똑같은 잔소리를 했어. 친구 가려가면서 사귀지 말라고. 누구든 사람이라면 장단점이 있는 거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나는, 싫은 친구랑은 끝까지 못 어울리겠는 거야. 싫은 건 그냥 싫었어.”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말이 꼭 틀리지만도 않았던 것 같아. 사람마다 여러 모습이 있고, 내고 보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


지우는 내 말에 눈을 떼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지우 말대로야. 실수는 누구나 하지. 하지만, 그 실수를 풀어가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지.”


지우는 물끄러미 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은이는 친구니까, 용서해줘야겠죠?”


그 말 끝에 머뭇거리는 표정이 눈에 밟혔다. 지우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어려 있었다.


“기회를 주는 건 분명 용기 있는 일이야.”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우가 모든 걸 참아야 하는 건 아니야. 좋은 친구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솔직해야 하는 순간이 있어. 지우 마음이 괜찮지 않다면, 그건 지우가 분명히 ‘아니’라고 말해도 되는 일이야.”


나를 거쳐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랐다. 그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끝나지 않는 후회의 되풀이 속에서, 지우만큼은 그 시간 속에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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