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회사를 다닐 때보다 지금 일상은 훨씬 단순한 루틴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 준비를 마친 뒤,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547번 버스를 타고 열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열 걸음만 걸으면 보이는 카페 지지. 익숙하게 번호키를 정확하게 누르면 나오는 경쾌한 음, 문을 열고 차례대로 불을 켠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밤새 꺼져 있던 장비들을 점검한다. 간단한 바닥 청소를 하고, 오늘 필요한 재료를 확인하면, 문득 생각이 든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곧 아이들이 만들어 줄 즐거운 하루를 떠올리며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던 찰나, 순이이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안아, 오늘 점심 같이 먹자! 이따 12시에 가게로 건너와~”
아이스크림 사장님과 불편했던 자리가 이후, 매일 아침 도장 찍듯 오던 사장님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바깥 볼일로 마주칠때면 ‘오늘은 좀 바빠서’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스쳐 지나가곤 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걸려온 순이이모의 전화는 무척 반가웠다.
장사 준비를 얼추 마치고 12시가 되어 순이이모네 가게로 갔다. 다 같이 점심을 먹은 뒤 처음 찾아간 자리라 그런지 괜히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순이이모는 반가운 얼굴로 자리를 안내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앉자마자 고개를 들었더니 에어컨 바람이 제일 잘 닿는 자리였다. 이모는 참, 사소한 것까지 따뜻하다.
잠시 뒤, 식탁 위에 놓인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바라보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너 닭고기 좋아했잖아. 여름이라서 몸보신 하라고 준비했지.”
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더 먼저 느껴진 건, 이모의 마음이었다.
“배가 고프면 생각도 잘 안 나는 법이야. 배고프면 괜히 짜증만 나잖아. 남기는 거 없이 다 먹어야 된다? 그래야 또 힘내서 일하지.”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말을 고를 수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담긴 마음을 알았는지 순이이모는 환히 웃었다. 우리는 대화 없이 칼국수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마음의 허함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손에 쥔 종이를 내려다봤다.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카페 문을 나섰다. 아이스크림 가게는 순이이모네 가게에서 학교 반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나왔다. 푸른빛의 시원한 인테리어가 아이스크림과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있게 걸어오긴 했지만, 막상 문 앞에 서자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춤거리며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사장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 카페 사장님 아니세요? 무슨 일이에요?”
“아,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한테요? 더운데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냉랭한 반응일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친절하게 가게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생각해보니, 순이이모 가게를 제외하고 이 동네의 다른 가게에 제대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게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테이블 없이 벽을 따라 놓인 벤치 의자들과, 쇼케이스 속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원한 거 줄까요? 아, 카페 사장님한테 믹스 커피는 좀 그런가?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나무 막대 위로 상큼한 오렌지빛 아이스크림이 먹음직스럽게 꽂혀 있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퍼지는 과일 향에 절로 눈이 커졌다.
“맛있어요? 우리 집 아이스크림은 제가 자부해요.”
이미 내 반응을 눈치챈 사장님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던 사장님은, 조심스럽게 막대를 내려놓는 순간 말을 건넸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뭐,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날 있었던 일이 사장님에께 불편했던 것인지 시선이 내 무릎으로 꽂혔다. 나는 사장님에게 준비해 간 종이를 내밀었다.
“그날 사장님이 하신 말씀, 처음에는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았어요. 사장님이 저한테 괜히 화풀이를 하신 거 아닌가, 생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사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더라고요.”
사장님은 내가 건넨 종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날카롭게만 보였던 인상이 어쩐지 조금 부드럽게 느껴졌다.
“제가 먼저 찾아뵙고 설명드렸어야 했던 거 같아요. 아니, 사장님뿐만 아니라 이 동네에서 함께 장사하는 분들께, 더 관심도 가지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요.”
“아니, 뭐…. 그래요, 맞아요. 내가 좀 막무가내였던 것도 인정해요. 그래도 이렇게 와서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사장님의 얼굴엔 살짝 머쓱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 표정이, 처음의 그 단단하고 날 선 얼굴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서 제가 고민을 해봤는데요.”
나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분위기였다. 찾아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을 하느라 늦게 잠이 드는 바람에 아침에 허겁지겁 준비해야 했다. 세면대 앞에 선 채 거울을 보니,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은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오늘 아침 출근길은 평소와 달랐다. 출근 전,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근처 인쇄소에서 포스터를 찾아 체크했다. 예상보다 더 만족스러운 퀄리티에, 새삼 어깨가 으쓱해졋다. 기분 좋은 마음을 안고 카페로 향했다. 오픈 준비에 앞서, 인쇄해 온 포스터 몇 장을 챙겨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포스터 가지고 왔어요.”
바닥을 쓸고 있던 사장님이 고개를 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 지안씨!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아이스크림 쇼케이스 위로 포스터를 펼쳤다. 사장님도 결과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직접 보니까 더 멋진데요? 지안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아니에요. 이제 정말 시작이네요. 우리 오늘부터 잘 해봐요.”
짧은 인사를 마치고 카페로 돌아왔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포스터를 붙였다. 오늘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늘 하던대로 오픈 준비를 하고, 새롭게 준비해야 할 것들도 체크를 했다. 과연 생각대로 잘 될까 염려도 되었지만 재빨리 머리속에서 지웠다. 긍정적인 생각만 하자고 마음을 다독였다.하교 시간이 되자마자 아이들은 카페로 쏟아졌다. 너무 덥다고 저마다 자리에 앉아 손부채질을 했다. 나는 차례대로 주문을 받았다.
“어? 스페셜 논칵테일이 뭐에요?”
목소리가 큰 친구 덕분에 이목이 집중 되었다.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아 크게 설명해줬다.
“아, 이건 여름 한정 메뉴에요. 건너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오면, 그 아이스크림 맛과 어울리는 음료를 만들어 드려요.”
포스터에는 긴 유리잔에 예쁜 색깔의 음료, 그리고 막대 아이스크림이 꽂혀 있었다. 색색깔의 음료 사진을 보고 아이들은 너무 예쁘다며 드뜬 목소리로 지금 아이스크림을 사와도 되냐고 너도나도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몇몇은 카페를 나가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로 달려갔다.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어설프지만 작은 퍼포먼스를 해본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레 긴 유리잔 안에 퐁 담근다. 아이스크림 색깔과 어우러지는 과일 시럽을 두 스푼 넣고, 탄산수를 가득 부은 뒤 조심스레 젓는다. 톡 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녹아드는 색. 그렇게 아이스크림 색과 어우러진 간단하지만 예쁜 음료가 완성됐다.
“그 여름의 자두 나왔습니다.”
주문을 한 친구는 얼굴이 상기된 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입을 모아 ‘우와!’하고 감탄했고, 곧이어 박수 소리가 터졌다. 카페 안에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모였다. 그 순간만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그 잔 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너무 예쁘다. 진짜 칵테일 같아.”
누군가의 감탄이 새어 나오자, 또 다른 친구가 얼른 말했다.
“이번엔 포도맛으로 해주세요!”
“이름은 ‘즐거운 여름방학’ 어때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잔을 하나씩 받아든아이들이 웃으며 이름을 짓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해서 주어지는 새로운 아이스크림에 이름을 붙이느라 바빴다. 작은 잔에 담긴 음료 하나에 기뻐하는 아이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아마도 오늘 이 순간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인생의 한 장면이 될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던 하루. 확실히 여름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해가 길어졌다. 마신 잔들이 테이블 위에 그대로일 만큼 손님이 끊이지 않아 정신없이 바빴다. 나는 쟁반과 잔을 정리하고, 잠시 숨을 고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맑은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지안씨, 고생했어요. 아까 잠깐 들렀는데 너무 바빠 보여서 좀 이따 와야겠다 싶었어요.”
아이스크림 사장님의 얼굴은,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모습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속에 단단하게 걸려 있던 무언가가 ‘툭’하고 내려앉았다. 갑갑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에요. 생각보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제가 감사했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서로 다른 아이스크림 고르겠다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나도 오랜만에 아이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참 좋았어요.”
사장님은 ‘앞으로도 서로 잘 지내보자’며 가벼운 얼굴로 카페를 나섰다. 오래 묵힌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다시 카페를 정리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지우가 들어섰다.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표정이었다.
“왜 저한테는 도와달라고 안 했어요?”
지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언니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 순간 지난 번 지우가 조심스레 내민 손이 떠올랐다. 내 문제에 급급해 지우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나는 말을 골라 천천히 말했다.
“지난번엔 네가 도와줬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었어. 아직도 네게는 너무 고마운 마음 뿐이야. 그런데 이번엔, 나 혼자 해내고 싶었어.”
지우가 내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진심은 통할 거란믿음이 있었다.
“어쩔 땐, 직접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도 있거든. 그래도 네가 도와준다는 그 한마디가 큰 힘이 됐어.”
나는 냉동실에 미리 넣어두었던 메로나를 꺼냈다. 지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해둔 작은 선물이었다. 메론 시럽과 함께 칵테일을 만들고, 긴 유리잔에 담았다. 초록빛이 지우와 참 잘 어울렸다.
“네가 좋아하는 메론맛 칵테일이야. 이름, 네가 지어줄래?”
지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잔을 조심스레 받았다. 그리고 작게,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음 …. 그럼, ‘우리는 영원한 친구’ 어때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좋아. 우린 이제 영원한 친구야.
너무 오랜만입니다. 반성합니다. 현생이 바쁘다보니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변명을 해보면서.
이렇게 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의 1부가 끝났습니다.
지안이도, 지우도 조금은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물론 저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사실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저도 두 친구의 종착점이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두 친구가 움직이는대로 움직여 보려고요.
다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